CULTURE

다른 나라에서

2013.02.06GQ

단지 여기에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있어야 할 번역 희망 도서를 물었다.“이 기회에 번역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는 모두 한결같은 인사말은 처음이었다.

 

< 손으로 만든 세계World Made By Hand >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힐링’과 ‘멘토’가 유행인 시대다.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사람들은 상처를 낫게 할 치유의 묘약을 찾아 헤맨다. 개인적으로 그것은 매우 상품성 높은 심리 마케팅으로 보인다.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시대의 근본적 모순을 과감히 꿰뚫어보는 상상력이 절실하다.‘파국’은 그런 상상력의 하나이고, 파국을 다루는 문학은 이를 통해 거시적 시각으로 인류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가령, 우리 시대 인류의 삶과 경제가 돌아가게 하는 에너지인 석유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인류는 지금처럼 심리적 위안만을 찾아 헤맬 수 있을까? 자본주의나 진보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개념일까?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는 < 장기비상사태 >를 통해 석유 부족 사태를 경고하며 석유-이후의 문명을 기술한 적이 있 다. < World Made By Hand >는 쿤슬러가 이 주제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현재’가 사라진 또 다른 ‘현재’를 묘사함으로써 쿤슬러는 파국속에서의 인간 행동의 다양한 측면을 상상한다. 몰락과 파국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지도교수에게 이 책을 추천받을 때만 해도 별 기대는 하지않았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후,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책이 없었다면 < 파국의 지형학 >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믿음은 하나의 신화다. 이 신화를 깨는 급진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비로소 새로운 뭔가를 생산해낼 수 있다. 사람들을 현재에 묶어두는 값싼 ‘힐링’의 묘약들과는 달리, 이 책은 체제의 근본을, 신화 너머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문강형준(문화평론가)

 

< 옹기장이의 밭Il Campo Del Vasaio > 안드레아 카밀레리

가끔 고민한다. 시리즈 소설이 한두 권만 번역되고 중단된 경우와 아예 소개되지 않은 경우, 어느쪽이 더 나쁜지. 우열을 가리긴 어렵지만, 전자가 낫다고 결론짓는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아예 몰랐을테니까. 문제는 그런 시리즈가 너무 많다는 것. 경찰소설 애호가로서는, 꽤 심각한 문제다. 경찰소설은 대개 시리즈다. 일부만 봐서는 소용이 없다. 흐름 속에서 비로소 인물은 진화하고, 사회의 변화가 반영되며, 함께 늙어가는 작가와 독자의 시간이 기록된다.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카밀레리의 ‘형사 몬탈바노 시리즈’도 그런 경우다. 1994년부터 일년에 한두 권씩 발표되어 20권이 쌓인 시리즈 중 1편 < 물의형태 >와 4편 < 바이올린 소리 >만 번역되었다. 후속은 감감무소식.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영어로 번역된 추리소설에 주는 국제단검상을 작년에 받은 13편 < 옹기장이의 밭Il campo del vasaio >은, 정녕 만날 수 없을 까? 이래 봬도 카밀레리는 작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인물이다. (도박사들의 베팅은 거의 없었지만.) 유럽에서는 꽤 인기라, 작가의 고향이자 소설의 배경인 시칠리아 마을 엠페도클레는 아예 소설 속 이름인 비가타로 개명했다. 이탈리아인답게 음식에 죽고 못 사는 주인공 몬탈바노 형사의 단골 식당을 찾아가는 관광 상품도 있다. 카밀레리는 베케트의 작품을 이탈리아에서 처음 무대에 올린 극작가 출신답게, 유머와 아이러니가 번득이는 대사로 정부의 부패와 마피아의 범죄를 서슴없이 그려낸다. 최근작에는 아마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풍자도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의 추리소설로 이탈리아인들과 동병상련을 나누고 싶다. 김명남(과학책 번역가)

 

< 질문의 책 Le Livre Des Questions > 에드몽 자베스

“우리의 그림자들은 모두 절규라네.” 이성복 시집의 한 귀퉁이에서 본 그 한마디에 2003년 어느 가을, 귀가 멍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나서 프랑스어로 쓴 유대계 작가 에드몽 자베스의 문장. 이후 데리다, 폴 오스터의 글에서도 그를 발견했다. M. 자콥, M. 블랑쇼, J. 데리다, E. 레비나스, P. 첼란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던 시인. 유대인으로서의 그 의 피는 글쓰기를 위한 고통스런 잉크였다. 그해 봄, 대구지하철참사가 있었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여름엔 태풍 매미가 지나갔고, 겨울엔 사담 후세인을 잡았다고 했다.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에서 그림자를 볼 때마다 아팠다. 2011년, 타국에서 리비아 친구를 만났는데, 정부지원으로 법을 공부하러 왔던 그는 얼마 후 새하얗게 질렸다.“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야, 내 삶이 송두리째 걸려 있어.” 아랍의 봄이 송출되는 동안, 가난한 그의 삶엔 공중 분해된 잿빛 미래가 인화되고 있었다.“한숨도 못 잤어.” 그해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 중동지역은 혁명으로 검붉었다. 실핏줄이 터진 그의 눈가, 나란히 앉아있던 그 강가를 기억한다.“난 절규를 들을 수 없어. 내가 곧 절규니까.” 또 한 번 자베스의 문장이 떠올랐다. 자베스를 열고 들어가게 한 뜨거운 손잡이였다. 송지선(문학동네 편집자)

 

< 청년 시절Youth > 존 쿳시

번역은 모국어라는 감옥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유사 탈옥 수단이다 . 해독할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올해는 읽을 수 있을까’ 목록을 가만히 살펴본다. 어떤 기약도 없어 무기징역처럼 포기하게 되는 책도 있고, 만기출소한 듯 조만간 번역되어 나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는 책도 있다. 이제 그렇게 지우고 고르기를 반복해서 마지막으로 남은 이 한 권의 특사를 요청한다. 존쿳시의 < 청년시절Youth >.‘시골생활에서 떠오른 장면들’ 3부작이라 불리는 < Boyhood >, < Youth >, < Summertime > 중 하나다. 소설을 일종의 사유방식으로 보는 쿳시가 젊은 시절 아프리카를 떠나 런던에 온 후 겪는, 작가가 되려는 욕망과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현실 사이의 갈등을 사려 깊게 다뤘다. 고향이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고 느끼고 어디로든 망명을 꿈꿔보았다면, 자신이 바라는 운명과 자신이 처한 처지 사이의 간극에 견딜 수 없어한 적이 있다면, 이 책에 몸이 기울 것이다. 어느덧 성장소설류에 눈길을 잘 던지지 않게 되었음에도, < 청년 시절 >에 대한 소문을 배수아의 어떤 글에서 접한 이후로, 하릴없이, 이 안개에 싸인 소문을 모국어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다려왔다. 쿳시의 자전적 성장소설 3부작 가운데 < Boyhood >는 < 소년 시절 >이란 제목으로 이미 출간되었다. 기다림의 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이 3부작을 한꺼번에 이어서 읽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신년특사를 간절히 기대한다. 박준석(문학평론가)

 

< 황금의 샘The Prize > 다니엘 예르긴

밤이 되기만 기다리던 중학생 시절이 있었다. 특선 다큐멘터리 < 더 프라이즈The Prize > 때문이었다. ‘드레이크 대령’이라고 불리던 한 사내가 미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에서 불굴의 집념으로 최초의 석유 시추에 성공했고, 존 D. 록펠러라는 이름의 사업가는 미국의 부를 휩쓸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마커스 형제가 조개껍질을 자신들의 문장으로 삼아 석유 사업에 뛰어든다. 석유라는 하나의 광물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술, 산업, 전쟁, 정치의 역사. 미국의 저널 리스트 다니엘 예르긴은 이 전지구적 대서사시를 한권의 책으로 축약해냈다. 중학생때 TV로 본 것은 미국의 PBS가 이를 8부작 다큐멘터리로 만든 것이다.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지적 체험이 평생에 또다시 가능할는지. 우물 안 개구리인 한국 사람들에게 절실한 넓고 깊은 시야의,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세계사가 통째로 담긴 책이었다. 고려원에서 < 황금의 샘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을 훗날 알았지만, 그 책은 수 많은 절판 도서 중 하나였다. 2008년이 되어서야 저자가 직접 개정증보한 신판이 나왔고, 2011년에는 킨들 용 전자책이 출시되었다. 모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 < The Prize >의 판권 사항을 문의한 적도 있는데, 아쉽게도 딱 한 달 전 어딘가로 팔린 후였다. 노정태(자유기고가, 번역가)

 

< 세계의 일품요리The Good Cook > 타임 라이프 북스

정확히 말하면,‘나머지도 번역되길 희망하는’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3년에 < 세계의 일품요리 >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타임 라이프에서 총 28권 중 10권이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80년대의 가정 전집류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책 역시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새것 그대로 헌책방에 보내기 일쑤였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 제2차세계대전 >은 그나마 군사 애호가들의 호평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지만.) 한국일보가 판매 부진 때문에 타임라이프와 제휴를 끝내면서 퇴직금의 일부로 타임라이프 전집을 떠안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푸대접을 받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책이다. 이 책은 여느 요리책-적어도 국내에 출간되었던 요리책-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각 권은 하나의 주제만을 다루고 있으며, 재료 선택부터 요리 방법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진짜’가 뭔지 보여준다. 요리를 배워보지도 않은 주제에 ‘진짜’가 뭔지 어떻게 아냐고?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보면 안다. 먹거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있다. 정말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본토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추천하기에 앞서 소심하게 웹을 뒤졌더니 찬사 일색이었다.) 요리책 좀 봤다는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좋겠다. 익힌 거위 고기를 뜨거운 물로 소독해서 잘 말린 단지에 넣은 뒤 녹인 거위 내장 지방을 부어서 저장하는법을 총천연색 사진과 함께 알려주는 책이 또 있나? 물론거위를 저장할 일은 없겠지만. 오태경(번역가)

 

알렉상드르 유니크에게 바치는 시집, 피에르 유니크의 시집

“그 순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주저하다가 마음을 비우고 마침내 말을 시작했다. 내 예언은 이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는 2150년경에 다시 유행할거야. 제임스 조이스는 2124년에 중국인 아이로 환생해. 토마스 만은 2101년에 에콰도르인 약사가 될 거고. (중략) 윤회. 시는 사라지지 않아. 그 무력함은 다른 형태로 부각될 거야. (중략) 또 누가 피에르 유니크를 읽을까? (< 부적 > 로베르토 볼라뇨)” 문학 편집자로 일하면서 얻은 첫 이름이 로베르토 볼라뇨였다. 칠레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생을 마감한 이 작가에 대한 말들은 잠시 미룬다. 지금은 어떤 예언을 빌려, 어떤 누설을 해야한다. 볼라뇨는 스페인어로 글을 썼다. 3년 전 편집한 볼라뇨의 ‘시-소설’(굳이 이렇게 부르고 싶다) < 부적 >의 말미에 수록된 위의 예언은, 이제 막 편집자의 삶에 들어선 이에게 시인의 삶을 바라도록 했다. 그런데 편집과정 중, 이 예언이 문제를 일으켰다. < 부적 >의 스페인어판과 영어판에는 위의 예언 속 이들 중 ‘피에르 유니크’가 ‘알렉상드르 유니크’라 적혀 있었다. 그런데 각주를 달고자 하니, 알렉상드르 유니크라는 작가를 찾을 수 없었다. 한편 프랑스어판에서는 이 자리에 피에르 유니크라는 이름을 적고 있었다. 볼라뇨의 작품 저작권을 관리하는 에이전시에 문의하자, 에이전시는 다시 볼라뇨의 전 부인에게 의견을 물었고, 수일 후 ‘피에르 유니크’로 표기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볼라뇨의 명백한 실수였다. 하지만 작가의 실수를 널리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볼라뇨 관계자들의 선택과 조언을 따랐다. 피에르 유니크라 표기한 후, 실재하는 작가 피에르 유니크에 대한 각주를 달았다. 그런데 사실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작가 알렉상드르 유니크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작가가 원래 쓴 대로 본문에는 알렉상드르 유니크라 표기하고, 각주에서 작가의 실수를 밝힌 후 피에르 유니크에 대한 내용을 더할 걸 그랬다. 이름 모를, 아니 정체 모를 시인 한명을 잃었다. 두권의 책을 펴내고 싶다. 잃어버린 시인 알렉상드르 유니크에게 바치는 시집 한 권,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이었던 피에르 유니크의 책 한 권. 김뉘연(워크룸 프레스 편집자)

 

< 블랙박스BlackBox >제니퍼 이건

201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니퍼 이건의 소설 < 깡패단의 방문 >의 ‘외전’이다. 이건이 트위터로 연재한 소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한번에 140자를 넘지 못하고, 한국말보다 자수의 제한이 더 큰영어로 소설을 썼다. 이런 형식의 구속복이 굳이 필요했을까? 문학 스턴트?설마. 이건이 밝힌 의도는 의외로 ‘의고적’이다. 트위터 소통방식에서 19세기 신문 연재소설의 유령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통찰의 문을 열어주지 못 하는 실험은 서커스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이건은 새로운 서사와 주제의 통합에 성공한다. < 블랙박스 >는 SF 스파이 스릴러다. < 깡패단의 방문 >에 등장하는 한 당돌한 소녀가 자라나 미래, 신영웅주의로 무장한 미국 정부의 첩보원으로 활동하며 겪는 하나의 사건을 담고 있다. 쇳내가 날 것처럼 엄혹한 문장의 대부분은 그녀에게 프로그래밍되어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지령’이 다. 그런데 읽어나갈수록 독자의 내밀한 자의식과 여릿한 감성을 건드린다, 아니 찌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드러나는 건 자기본위적인 세대의식을 탈피하기 위해 의식을 블랙박스로 만든 인간이, 혹은 비 인간이 여전히 버리지 못해 시달리는, 혹은 향유하는 트라우마와 추억이다. 가령 적을 살해하기 직전에 체내 스피커로 들려오는 말 (“우 리가 가장 주저하게 될 때는 쓰러뜨려야 할 상대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때다”)은 서부극의 통속적인 허세를 빌렸지만, 이건을 통해 소통 불능의 시대에서 오가는 교감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 아픈 쾌감을 한국말로 다시 느끼고 싶다. 최세희(대중음악평론가, 번역가)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레이션
    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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