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형식적인 영화

2015.03.24GQ

해외 영화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형식을 찾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주 형식적인 영화만 살아남았다.

 

*사과드립니다. 4월호의 크리틱 기사 ‘형식적인 영화’가 인쇄 오류로 절반만 실렸습니다. 전문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5월호에 다시 실을 예정입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2002년 4월호 <키노> ‘Editorial’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열병 같은 홀림은 남의 시선에 눈을 닫고 남의 말에 귀를 닫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즘은 신기하게도 그 사랑을 온통 한국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이정향의 <집으로…>의 시사회가 차례로 있었던 이달은 자신의 연인을 향해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많은 연애편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13년 전 4월엔 영화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이 세 편의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굳이 세 편 중 하나만 고르자면 각자 취향에 따라 순서를 정할 수 있겠지만, 모두 좋은 ‘보기’다. 그때는 ‘고를 만한’ 영화가 많았다. 덕분에 사람들이 영화를 꿈꿨다. 10여 년 전의 한국영화들은 말 그대로 ‘영화’ 같았을까? 하필 떠오르는 장률 감독의 말. “영화는 삶과 같은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영화를 할 필요가 없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영화가 초현실로 남아야 하는 이유. 

최근 개봉한 영화 <버드맨>에서 한물간 슈퍼히어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재기를 위해 연극을 올린다. 그의 연극은 끝내 <뉴욕타임>의 비평가에게 ‘슈퍼리얼리즘’을 개척했다는 평을 듣는다. 영화는 그 자체로 극사실주의적이다. 그냥 마이클 키튼의 실제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줄거리를 하나의 롱 테이크로 찍었다. 꼭 한 편의 연극. 영화는 이 형식을 위해 편집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컷’을 삭제한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모든 이들의 삶은 연속적인 스테디캠 촬영 같은 것이라고.” (<씨네 21> ‘추락하라 그러면 비상할 것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말처럼 리건의 3일 동안의 행적을 편집 없이 따라다닌다. 그러니까 관객은 영화를 ‘경험’한다. 낯설지 않은 관객도 있다. 비슷한 경험을 재작년에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에서 표류한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를 바로 앞에서 보듯이 관찰하고 때론 스톤 박사의 시선이 되기도 했다. 알폰소 쿠아론은 우주에서 유영하는 경험을 연출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 감독이 찍었고, 연달아 아카데미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어쩌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것 보다 중요한 지점일 수 있다. 루베즈키의 롱 테이크 촬영은 9년 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 드런 오브 맨>으로 이미 각광받았다. 그 결실이 전혀 다른 문법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3차원 스크린을 통한 1차원적인 경험. 쿠아론과 이냐리투, 루베즈키의 조합은 영화를 감상에서 경험으로 빠르게 확장시키고 있다.

사실 영화는 경험을 넓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바타>는 3D 영화 시장의 문을 완벽하게 열었다. 기술과 이야기, 마케팅의 적절한 조화는 ‘신화’와 같은 흥행으로 이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물이 터지며 바람이 부는 4DX는 <아바타>와 같은 완벽한 킬러 콘텐츠 없이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최근엔 선명하고 커다란 화면을 경험하기 위해 영화와 상관없이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는 사람도 많다.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TV와 같이 집중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쿨 미디어’와 다르게 영화는 정세도가 굉장히 높은 ‘핫 미디어’다. 그러니까 TV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엄청난 집중이 필요한 매체란 뜻이다. 사실 누군가에겐 두 시간 넘게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게 화장실에 가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폭력’적인 환경일 수 있다. 꽤 오랫동안 사람들이 영화를 그렇게 봐왔고, 그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전례 없이 수많은 매체와 경쟁하고 있다. 이미 TV와 게임과의 전쟁을 통해 많은 영토를 내주었다. 수많은 뉴미디어, 특히 동영상 중심의 SNS와도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짤막한 클립으로 소비되는 새로운 ‘쿨 미디어’에 익숙해지면서 영상을 가볍게 시청한다. 이제 영화가 사람들에게 집중력을 강요하기 힘든 시대다. 

재빠르게 최근 영화 몇 편을 소개하고 싶다. 아카데미에서 <버드맨>과 경쟁한 <위플래쉬>는 소리에 집중하는 영화다. 화면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도구 같다. 이 영화가 새롭다 느껴지는 건 철저하게 ‘듣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와 플롯마저 포기했다는 점이다. 광기어린 연기가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연기 자체가 비트로 쪼개지기 때문이다. 함께 아카데미에서 경쟁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세계의 ‘집대성’이다. 웨스 앤더슨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실제 역사를 비틀며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다. 충분히 제2차 세계대전의 어느 동구권 국가를 떠올릴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나라도 떠올리기 힘들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이야기는 ‘웨스 앤더슨 월드’를 보여주는 수단이다. 이 견고한 세계 속에선 어떤 이야기라도 상관없어 보인다. 만약 이 세계를 의심하고 몰입하지 못하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색하다. 마지막으로 작년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마미>다. 감독 자비에 돌란은 1 : 1 정방향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중형 카메라 포맷으로 기억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겐 인스타그램의 형식으로 익숙하다. 그동안 어떻게든 가로를 더 보여주고자 2.35 : 1, 즉 시네마스코프로 찍으려한 많은 감독들의 노력과는 정반대의 선택이다. 좌우가 꽉 막힌 화면엔 배경은 사라지고 인물만 남는다. 덕분에 SNS처럼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다.

이런 영화 형식이 기존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도전을 비평의 집합체인 각종 영화제가 주목하고 있다. 단지 ‘키치’한 도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영화로 선정한다. 물론 단지 형식에만 매달린 게 아니라 그 내용과 만듦새가 아주 근사하다는 대전제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영화의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기술과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영화가 지속적으로 개봉되는 것이다.

장률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초현실이다. 그 초현실에 관객이 몰입해야 영화는 성립한다. 하지만 관객은 이제 웬만한 자극에 둔감하다. 그 탓에 영화는 미학적 성취가 아닌 생존의 문제와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외 영화인들은 극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다.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상관없이 말이다. 

1천만 관객이 보는 한국영화가 자주 나온다. 그럼 그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 성공한 걸까? 일관된 파도가 있다. 어떤 의미로 ‘사실’적인 흐름이다. 극영화들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 실화를 재구성한다. 게다가 유례 없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진실을 고발하려 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관찰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고자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한국영화는 어떤 형식이든 실제 사건과 현실을 스크린에 담으려 애쓴다. 주제가 극사실주의다. 관객은 스크린 위에서 실제 세상을 본다. 영화를 통해 정치인을 추억하고, 애국심을 확인하고, 지나간 70년대를 되돌아보거나 부모님을 자랑스러워한다. 영화를 통해 범죄를 다시 기억해 이슈로 만들고, 공분을 유도한다. 한국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건 영화관에 가기 전 잊고자 했던 현실이다. 그걸 공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영화가 몰입을 전제로 하는 매체라면 과연 정치적인 장치는 아닐까? 영화는 관객에게 동의를 구한다. 관객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아젠다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 탓에 영화를 부정하면 꼭 영화의 주장을 거부한 것 같다. 극장을 나서면서 생각한다. “안타깝다, 자랑스럽다, 화가 난다.” 한국영화를 보고 “신기하다, 아름답다, 이상하다, 특이하다” 여겼던 건 대체 언제였나? 

<복수는 나의 것>은 차가웠다. 그 어떤 영화보다 차가워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박찬욱은 여전히 더 차갑게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 같다. <생활의 발견>에선 홍상수가 생각 하는 영화의 ‘형식’이 앞으로 어디쯤에 위치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13년 동안 그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정향 감독을 기다린다. 첫 번째 영화 <미술관 옆 동 물원>과 두 번째 영화 <집으로…>는 멜로드라마와 가족 영화의 형식을 조심히 부쉈기 때문이 다. 그녀가 최근 영화 <오늘>로 주춤했어도 이제 세 편을 찍었을 뿐이다. 또한 그보다 완벽하게 새로운 형식과 그걸 추구하는 새로운 감독을 기대하기도 한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기존 방식을 파괴하는 기개.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상관없이 말이다. 한국의 제임스 카메론을 기다린다는 식의 허무맹랑함이 아니다. 

    에디터
    양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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