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새로운 문학이란 가능한가?

2017.01.11GQ

첨예한 소설가 정지돈은 일종의 문학론으로서, 과학의 객관조차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시대에 문학만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문자 과학 Science 정상과학 Normal Science은 토머스 쿤이 만든 용어로 과거의 성취에 기반을 둔 과학 연구 활동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정상과학은 과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한번 발견된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방식이라는 뜻이다. 쿤의 이런 생각은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졌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다.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적 사실은 실험실에서 구성된 사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과학이 DNA 같은 자연의 요소를 어느 날 발견한 게 아니라, 기술과 생각을 조합해 대충 이런 걸 DNA라고 하자는 식으로 구성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과학인문학자들의 이런 생각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과학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1995년 ‘과학전쟁’이라고 불리는 국제적인 학술 대토론의 장이 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전쟁에서 각 진영의 학자들은 서로의 주 장이 얼마나 무식하고 한심한지 공격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인가 아닌가. 뉴턴의 법칙은 진리라고 믿어졌지만 20세기에 완전히 박살났다. 그러나 과학을 옹호하는 이들은 과거의 과학적 사실이 깨져도 자연을 관찰하고 법칙을 찾는 실험 과정 자체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브루노 라투르는 실험 과정에 이미 기술-사회적인 요소가 포함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자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이미 우리가 만든 기술-사회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규명할 수 있는 자연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진영 사이에 아직 완벽한 화해의 장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토머스 쿤에서 브루노 라투르를 거치는 동안 과학에 대한 관점은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브루노 라투르는 객관적 지식으로서의 과학은 몇몇 과학자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라며 이를 ‘대문자 과학’이라고 불렀다.

대문자 문학 Literature 나는 브루노 라투르를 따라 대문자 문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문자 문학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따른다.

1. 문학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2.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3. 문학은 세계의 심연을 드러낸다.

이 셋은 평론가나 작가, 독자들이 빈번하게 쓰는 어구들로 문학에 대한 자명한 진리처럼 여겨진다. 여기에는 휴머니즘, 리얼리즘, 본질주의, 문학 근본주의 같은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이러한 대문자 문학은 몇몇 사람의 머릿속 에만 있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완고해서 현재 한국 문학계를 산업적, 비평적으로 지탱하는 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문학 작품에 가장 많이 쓰이는 홍보 문구들을 떠올려보면 금세 안다.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수작!”, “한국 사회의 폐부를 드러낸 걸작!”

내 작품은 종종 1. 비인간적이다, 2.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3. 심연을 드러내지 않는다, 는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터무니없는 비판이다. 1. 내가 로봇이라도 된단 말인가! 2. 내가 가상 공간에라도 산단 말인가! 3. 심연이라니…. 지난가을 한 시인은 문학 좌담에서 나를 알파고라고 지칭했다. 반쯤 농담이이었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인류의 적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문학계의 이세돌은 누구 였을까. 아마 대문자 문학이 아니었을까.

탈정상과학 Post Normal Science 제롬 라베츠는 192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1950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수학과 과학을 전공했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매카시즘 당시 여권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과학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71년 저작 <과학 지식과 그 사회적 문제들>을 통해 자본 종속적이고 지적 재산권을 강조하고 연구비에만 신경 쓰는 산업화된 과학을 비판했다. 제롬은 자신의 방식을 비판과학이라고 불렀다. 그는 1980년 리즈 대학교 연구원인 동료 실비오 펀토위츠를 만나 비판과학에서 짚었던 불확실한 과학의 문제에 더 주목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과학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점점 더 답을 내릴 수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기후 변화나 원자력 발전, 유전자 변형 식품 등은 과거의 과학 개념으로 더 이상 다룰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1992년, 제롬 라베츠와 펀토위츠는 이런 생각에 따라 토머스 쿤의 정상과학 개념을 확장시킨 탈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제롬 라베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적으로 과학은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답을 제시했습니다. 지금, 현실은 더 복잡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탈정상문학 Post normal literature 나는 제롬 라베츠를 따라 탈정상문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탈정상문학은 사조에 따른 과거의 문학적 구분, 이를테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순수와 참여, 전통과 전위, 대중과 전문가라는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해체와 상대주의 노선을 따르지도 않는다. 또한 대문자 문학이 근본적인 문학의 속성이라고 가정한 것을 전복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탈정상문학은 달라진 인간과 환경을 반영한 새로운 프레임과 사고 영역을 탐구한다.

1. 문학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 탈정상문학은 인간이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감정의 영역, 신체의 영역, 앎의 영역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은 여전히 반대말인가. 디지털 가상을 통해 체험하는 신체/정서적 반응은 비인간적인 체험인가. 접속 가능한 정보가 무한대에 가까울 때 인간의 지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우리는 바뀐 인간에 맞는 질문을 해야 한다.

2.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에서는 인간뿐 아니라 사물도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본다. 자연이라는 개념 안에 기계나 상품도 포함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책, 영화, 게임 등의 인공 물을 동일한 행위자의 범주에서 다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상투적인 도식인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비판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인공물 행위자는 생물처럼 스스로의 발전 체계를 가지며 행위자들은 서로의 체계가 그물망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를 구성한다. 탈정상문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 인식을 요구한다.

3. 문학은 세계의 심연을 드러낸다 | 심연을 드러낸다는 말은 일종의 본질주의로 문학의 진정성을 진단하는 어구로 사용된다. 이에 대해 탈정상문학은 표피적인 것이 곧 심연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표피적인 것은 작품의 내적인 형식이나 내용만이 아닌 외적인 시스템도 포함한다. 작가는 표피적인 것을 재배치하고 균열을 내는 방식을 통해 문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책의 표지, 표 4의 문구, 표 2의 프로필, 작품의 해설, 도서의 유통 방식, 홍보 문구의 방향 등을 작품의 요소로 여기고 창작 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다. 미술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작품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탈정상 문학에서 표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문학전쟁 1995년 과학계에서 있었던 것처럼 문학에서 문학전쟁이라는 이름의 토론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학과 달리 문학은 사회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영화와 드라마의 시녀고 필름 사진처럼 소수의 취미이며 클래식처럼 국가나 아카데미의 지원 없이는 유지하기 힘든 산업이 되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향수에 기대 근근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일뿐이다. 그럼에도 문학에서 전쟁이 있어야 한다면, 이는 문학이 언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만들고 세계는 언어를 만든다. 그리고 세계는 이미 달라졌다.

    에디터
    GQ 피처팀
    정지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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