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새로운 남자

2017.01.20GQ

성차별, 혐오 범죄, XX계 내 성폭력, 여성 대통령, ‘여배우’라는 말, 중식이밴드와 디제이 DOC, 한국남자, 페미니즘…. 2016년을 가늠하기로 이만큼 뜨거운 관심과 논쟁을 일으킨 이슈가 있을까? 옳은 것을 향해 질리지도 않는 싸움은 계속되는 중이다.

2016년 ‘올해의 남자’를 뽑는다면 내게는 배우 박보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세자를 연기한 박보검이었다. 연예 면 뉴스에서 ‘박보검 미담 시리즈’라고 불릴 정도로 주변 배우들이 입을 모아서 ‘박보검은 정말 착하다’, ‘남을 배려한다’ 칭찬하는 것 외에도, 이영 세자의 모습이 ‘박보검 미담’에 겹치면서 착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를 새삼 생각하게 됐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의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나쁜 남자’가 지배했다. TV 드라마, 영화, 만화, 가사에 이르기까지 터프하고 강하고 사랑받아본 적 없어서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무대를 장악했다. 긴 분량의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그 남자에게는 차마 떠올리기 싫은 거친 과거가 있고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으며 마음속에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살 사람/이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울분의 활화산이 끓고 있다. 그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먼저 그를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의 상처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패악과 나쁜 선택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사람,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가 감싸주고 지켜줘야 할 사람(그러니 그보다 ‘낮은’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착하고 너그럽고 배경이 더 든든한 제2의 남자가 등장하지만, 그 착한 남자는 결코 나쁜 남자로부터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나쁜 남자보다 매력이 덜해보인다. 그런 나쁜 남자들을 너무나 오랫동안 봐온 탓에 이게 한국의 ‘보편적인’ 남자인 줄 착각할 뻔했다.

그러다가 <구르미 그린 달빛>이 도착했다. 드라마 속 이영 세자는 결코 주변 여성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거나 꾸짖거나 비웃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영 세자가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는 대상은 그보다 권력이 막강한 대신들뿐이다.) 어릴 때 숨을 거둔 어머니 대신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새어머니 숙의 박씨에게는 늘 따뜻하고 정중하게 대하며, 숙의 박씨가 나이 들고 병들면서 아버지인 임금에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 아파한다. 모종의 사고로 입을 닫은 어린 의붓동생 영은옹주가 혹여라도 외로울까 봐 틈나는 대로 재미있게 필담을 나누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세상 물정 모르고 먹는 것만 탐닉하는 동생 명은 공주가 어리석은 사랑놀음에 빠져있어도 비웃거나 꾸짖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상대방이 정말 괜찮은 남자인지, 동생에게 잘해줄 수 있는 남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찾으러 나선다. 사랑에 빠진 여인 라온과는 말도 못할 신분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널 너무 사랑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이런 못난 나를 용서해라”라며 오열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다가 “내가 그 슬픈 결말을 바꿔보겠다”라고 단단하게 다짐한다. 그는 좋아하는 상대에게 확신을 주고,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 그대로 속아넘어가 배신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런 언행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곧바로 헤아리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담백하게 감싸 안는다.

조선 시대의, 단명한 효명세자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판타지에 가까웠던 이 드라마에서, 이영 세자의 행동거지와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가 인상 깊게 남았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다. ‘착한 남자’를 보고 싶었다는 걸, 이영 세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텔레비전만 틀면 누가누가 더 악독하게 센 소리를 타이밍 좋게 던지는지 경쟁하고, 비꼼과 무시가 ‘사이다’ 소리를 들어가며 서로 “아이고 형님 아우님, 대단하십니다”하고 밀어주는 에피소드로 여겨지고, 목소리 큰 남자들이 우르르 집단 MC를 보며 자신들이 ‘중심’인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만 접하다 보니 이게 그냥 지금 한국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은 그냥 거부하면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의 이영 세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품위 있고 상냥하고 다정했다. 옆의 약자들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이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 인정하는 허구의 인물에 대한 신드롬적인 열광에는, 동시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 손가락이 존재한다. 그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어렴풋하기만 했던 형상을 뚜렷한 실체로, 한때의 판타지가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현재로 바꿔놓았다.

최근 SNS상에서 논란이 되었던 어떤 인디밴드의 보컬이 자신의 노래 가사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나중에 그는 이 글을 지웠다.) “보통 남자는 보편적이란 이유로 욕을 먹는데…그 욕하는 이유가 찌질해서…라더군요. 돈 없고 자기 집 없고 직업도 구린 가끔 리벤지포르노를 보는 아주 보편적인 찌질한 남자, 그리고 그것이 보통 남자다… 그게 보편적인 거다….” 여성들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라는 정도의 인식에는 겨우 도달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다음 순간 터져나온 건, 그 자체가 ‘범죄’인 리벤지 포르노를 보는 건 보통 남자의 일상이므로 너희가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항변이다.

나는 여자를 때리지 않고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니 나는 나쁜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나 같은 남자들을 만나주지 않고 좋아해주지 않는 너희 여자들의 잘못을 인정해라. “남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다 애야, 남자가 다 그렇지” “남자는 그저 개와 같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사람이 아니고 개라고 생각하면 절대 싸울 일이 없다”는 ‘농담’으로 남자들의 찌질함을 너그럽게 묻어달라는 어리광, 이 세계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우리 집 안방의 연장선상인 양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엄마’인 양 혀를 끌끌 차면서도 자신의 매력을 알아주고 밥도 차려주고 불평불만을 다 들어주길 바라는 응석, 나의 초라함과 어리석음과 찌질함까지도 남들이 ‘그러려니’ 넘어가주길 바라는 기대심리,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나는 너희들의 잠재적 아군이었지만 그렇게 무섭게만 얘기한다면 그 지지를 철회하겠다”라며 스스로를 심지어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지우는 적반하장. 더 이상 이런 우는 소리를 참아줄 수 없다는 것이 지난 2016년에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2016년 5월 17일의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무수한 여성이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이를 악물고 선언했다. 여성들은 더 이상 난폭한 남자들을, 약한 존재에게만 강한 남자들을, 세상 사람 모두가 ‘엄마’ 같길 바라는 남자들을 참아줄 수 없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제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체념하지 않는다. 착한 남자를, 기존의 ‘여성적’ 역할을 아무렇지 않게 수행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특별하다고 자부하지 않는 남자를,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공부하겠다는 남자들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한다. 박보검이 연기한 드라마 속 이영 세자를, 혹은 <삼시세끼>에서 묵묵히 재료를 손질하고 근사한 요리를 하면서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내세우지 않는 에릭을 지지한다. 2016년 초부터 충남의 주요 도정 운영 방안으로 “여성과 소수자 인권 보장 및 양성 평등 정책 진전”을 꼽았고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 사진을 올리며 “오랫동안 미루어온 숙제…여성주의를 공부한다”고 다짐했던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진지하게 평가한다. 얼마 전 V앱 무비토크 행사에서 흥행 공약으로 여자 배우들의 무릎 담요를 내리자는 농담을 던졌다가 정색한 팬들의 항의가 쇄도하자 “나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덤빈다”는 식으로 토를 달지 않은 채, 해당 배우들 및 관객들에게 “사과드리고 깊이 반성한다”라고 고개를 숙인 배우 김윤석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여자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이해하지 못함의 불통은 평평한 땅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많은 이가 ‘양성 평등’을 잘못 이해하고 있듯 말이다.) 한국의 여성들은 한국의 남성들 처럼 어릴 때부터 ‘고추’가 달렸다는 이유로 과감한 알몸 백일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고, 무조건적인 귀여움을 받으며 어지간한 말썽에는 관대하게 용서받고, 또 그만큼 집안의 기둥과 가장이 되라는 압박을 받으면서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나아가라는 채근을 당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그들만큼 많은 기대와 관용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들만큼 밤거리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활보해본 적이 없고, 섹스를 할 때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오만 가지 생각 없이 몰두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남성들은 한국에서의 여성이라는 약자의 위치에 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군대에서 겪은 부당한 상황 때문에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경우는 가끔 접한다.) 이 이해하지 못함의 차이는 명쾌하다. 강자였던 적이 별로 없는 성별과, 약자였던 적이 별로 없는 성별. 당신이 후자에 속한다면, 그래도 찌질함과 못남과 투정이 ‘우리들의 보편’이라고 우기는 쪽에 속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좀 더 멋지고 똑똑하며 배려심 깊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돼라. 세상은 결단코 내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여성이 겪는 부당한 성차별과 온갖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세상 모든 남자가 그런 게 아니야, 그런 놈들은 일부에 불과해”라거나 혹은 “우리도 알고 보면 힘들어”로 말문을 열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일부 남자들’ 중 한 명이 돼라. 그저 실행에 옮기라. 한국에는 바로 그런, 당신 같은 인재가 정말 필요하다.

    에디터
    GQ 피처팀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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