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안양’의 아이들

2018.03.07GQ

귀여니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오토바이를 탄 채 대기하는 곳, 안양. 그곳은 내게 인터넷 소설의 수도이자 ‘인소’ 문명의 발상지였다.

서울에 정착하면서 지리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 많았다. 내가 살던 곳보다 열 배쯤 복잡한 지하철 노선,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분포된 번화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의 이름들. 그중에서도 제일 까다로운 것은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도시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인접 도시 간의 물리적 거리, 지형적 격차가 큰 지방 도시 출신의 나에겐, 겨우 지도에 그어진 선 하나로 다른 시가 되는 경기도가 신기했고, 그렇게 나뉜 경기도 도시마다 각자 고유한 정서와 특색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기도민들이 어려웠다. 착오가 많았다. 분당과 일산이 시의 지명이 아니라 성남시와 고양시 내 자치구 이름이라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고, 연천, 포천, 동두천은 같이 있는데 왜 부천만 떨어져 있는 것인지 화가 났으며, 남양주는 구리 쪽 남양주와 하남 쪽 남양주 두 구역이 있다는 것도 혼란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늘 안성이랑 안산이 헷갈렸다. 수원 토박이인 학교 선배가 안성은 ‘안성맞춤’이라 외우고 안산은 ‘아무도 안 산다’고 외우라고 했는데 대체 뭘 구별할 수 있단 말인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아마 본인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안성은 서울보단 충청도에 더 가깝고, 위치를 고려한다면 안산과 안양을 구분하는 쪽이 더 어려웠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까지 싸잡아 묶어 ‘서울’이라 부르던 남부지방 사람인 나에게도 안양만큼은 그냥 경기도에 속한 수많은 아무개 도시 중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가보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애착이 가는 도시였다. 지금 이 글을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쓰고 있다면 아마 나는 분홍색 색연필로 커다란 하트를 그린 뒤, 그 속에 ‘안양’ 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10대 시절, 귀여니는 나를 지루함에서 구해준 메시아였고, 그래서 <늑대의 유혹>은 나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아니 <성경>보다는 <삼국지>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지는 공고, 상고 간의 거대한 패싸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할아버지 유령들 간의 땅따먹기보단 이쪽이 훨씬 더 멋진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 않나? ‘치정-_-+’, ‘폭력ㅡㅡ^’, ‘시련ㅠ_ㅠ’, ‘사랑+ㅁ+’ 그리고 ‘죽음’까지. 하나만 말하기에도 벅찬 인생의 대주제들을 하찮은 이모티콘들에 실어 책 한 권에 담아낼 수 있다니. 나는 세 번을 완독하는 동안 매 순간 감격했다. 그래서 <성경> 속 성지를 그려보는 신도처럼 안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안양은 어떤 곳이란 말인가? 노래방 스피커로 나오는 고성의 한국 록 발라드가 전쟁의 시작을 알리면, 교복이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안양1번가에 모여 오직 사랑 때문에 전쟁을 하는 곳! 정태성과 반해원이 강동원과 조한선의 얼굴을 하고 학교 정문 앞에서 오토바이를 탄 채 대기하는 곳! 안양, 그곳은 내 마음속에서 인소의 수도이자 인소 문명의 발상지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저 한때의 신드롬으로 남아버린 안양-인터넷 소설-감성을 다시 환기하게 된 것은 몬스타엑스 멤버 원호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일본 학원 만화 주인공 같은 얼굴과 스포츠 만화 주인공의 체형을 가진 그는 인간으로 환생한 인터넷 소설이었다. “10대들 사이에서 귀여운 얼굴로 유명했던 1번가의 얼짱이 근육질 아이돌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요약한 이 문장 자체가 <내 남편은 일진짱> 같은 베스트셀러 인소의 제목이나 다름없지 않나. 대놓고 자신을 ‘인소남’이라고 소개하는 그가 “‘사랑해’ 라는 말은 참고 참다가 죽을 것 같을 때 딱 한 번 하는 거야. (…) 사랑해” 같은 말을 팬들에게 서슴없이 할 때. 귀여니 문학의 신도인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목숨과 운명을 쉽게 내걸어 버리는 그 참을 수 없이 무모하고 가벼운 사랑의 말! 그가 만든 곡의 가사가 “겁 없이 살아봐 임마. 쫄지 마 임마”, “내가 너로부터 그걸 느껴. 사랑을”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거의 정신을 놨다. 뜨거운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도치로 문장을 정렬하는 것은 1번가 인소남들의 공식 문법이니까. 나는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도치법 가사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을 부른 바로 그 한 남자를 연상했다. ‘한 남자’는 누구인가? 개벽으로 안양 땅이 침식해도 안양 출신으로 제일 먼저 거명될 연예인! MC스나이퍼가 느닷없이 지옥으로 만들어놓은 안양1번가의 이미지를 본인의 설화를 통해 단번에 제패하는 연예인! 모든 질문에 “당연하지”로 대답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게임에서 윤은혜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못된 공격에 그녀의 두 귀를 막고 나서야 비로소 “당연하지…” 를 조용히 외칠 수 있었던 원조 인소남. 원조 근육질 미성가수. 만안구의 얼. 1번가의 혼. 안양의 현신. 경기도 안양의 김종국! 10대와 20대를 거쳐오며, 인소남들은 사실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과 건강이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지만 안양 출신의 남자 연예인만 보면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인소남의 클리셰를 끌어다 마음대로 해석하는 버릇을 고칠 순 없었다.

나는 안양이 인소를 비롯한 영원한 학원물의 배경이자 청소년의 도시라 생각한다. 유서 깊은 연예인 명문사학 안양예고와 수도권 최대의 학원가 평촌 신도시, 그리고 안양1번가를 무리 지어 배회하는 교복 히어로들. 그렇게 세 부류의 청소년들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20대 중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교복을 입고 10대를 연기해도 전혀 거북함이 없는 배우 이현우는 그런 의미에서 ‘안양 청소년’의 표본이다. 이현우가 연기하는 10대는 언제나 저 안양 삼각형 안에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껄렁하게 굴다가도 마지막엔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소년.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도, <무림 학교>에서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 바쳐 가장 소중한 것을 구원하는 10대였다. 나는 강인한 안양 청소년의 이미지를 구구단의 김세정을 통해서도 느낀다. 서바이벌 <프로듀스 101> 중간 순위 발표에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 내가 꽃길만 걷게 해줄게”라는 소감을 밝힌 그가 IOI를 거쳐 구구단으로 데뷔한 뒤, 알바천국 CF의 모델이 됐을 때 나는 앞으로 알바천국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모델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장담했다. 그가 많은 여자 아이돌 사이에서 좀 더 폭넓은 층에게까지 어필하는 이유는 안양 청소년 특유의 자립심이 강한 이미지가 한몫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 내에서도 안양 지역 청소년들은 곧잘 ‘내일이 없이 노는 애들’ 같은 것으로 해석되지만 왜인지 그들은 개인의 자립, 출세, 효도 같은 것에 뜻이 있는 것 같단 느낌을 받는다. 그런 안양 청소년들의 좀 특별한 정서.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는데, 또 다른 안양의 스타, 안양예고의 전설 비가 최근에 낸 노래 제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유입과 이동이 잦은 경기도 도시들은 거기서 태어난 사람만이 정통성을 획득하는 곳은 아니다. 안양 출신 연예인을 논할 때 안양예고의 가장 유명한 졸업생 중 하나인 비를 소환해도 큰 무리가 없는 까닭이다. 아니, 그에게 안양의 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2017년에 ‘깡’ 이라는 걸 노래 제목으로 쓸 수가 있냔 말이다. 나는 “Call me 오빠’, ‘나? 비효과!” 같은 가사를 부르는 비가 너무 징그러우면서도 귀여웠다. 마치 서울에 갔던 오빠가 안양으로 다시 돌아와 빈둥대는 모습처럼 느껴졌고. “15년을 뛰어 모두가 인정해 내 몸의 가치 허나 자만하지 않지”라고 자만하는 대목이나 “허세와는 거리 멀어 귀찮아죽겠네 알다시피 이 몸이 꽤 많이 바빠”라는 허세와 완전히 맞닿아 있는 대목을 부를 때가 특히 그랬다. 한때 모든 남자 연습생들의 롤 모델이자 월드스타였던 그의 감성은 여전히 엄마를 위해 텅 빈 연습실 거울 앞에서 독백으로 성공을 다짐하고, 쉬는 시간마다 세븐과 댄스 배틀을 하던 안양예고 복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학교 출신 연예인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도 청소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박한별을 볼 때마다 그가 어떤 배역을 맡아도 늘 얼짱 고등학생 같다는 점을 좋아한다. 모든 얼짱의 조상, 아니 얼짱이란 단어 자체가 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오직 얼굴만으로 유명해진 자의 대체할 수 없는 이미지. 그 학교의 전설처럼 내려오던 세븐과의 하이틴 로맨스는 당시 전국의 청소년들이 가장 동경하던 가십이었고, 인터넷 소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상 캐스팅 속 여자 주인공은 모두 박한별이었기에. 그렇게 인터넷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았던 가상의 학원 도시 안양은 비와 박한별 같은 현실 속인물과 만나며 실재하는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역의 보편적 이미지와 개인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출신지로 누군가를 특징 지으려는 것은 어쩌면 억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역 정보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단서이고, 지역적 특질을 통해 누군가를 이해해보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나 안양 출신의 사람들에겐 그 정보가 그들의 장점을 설명할 때 괜찮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양 출신 사람들이 말하는 안양이 정말 좋은데, 쓸데없이 보수적인 지역 프라이드를 공유하고 있던 비-수도권 지방에서 자랐기에 그들이 자조하며 말하는 안양의 디스토피아적 묘사가 늘 재미있고 어딘가 통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오랜만에 안양 출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친구가 대뜸 내가 생각하는 안양의 이미지가 뭐냐고 묻길래 “김종국, 오토바이, 교복, 복수, 사랑, 죽음…” 이라고 하니, “아니…. 뭔 또라이도 아니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마저 내가 생각하는 안양 그 자체라고 받아치자 친구가 또 웃었다. 안양 연예인에 대해 내가 가진 애착을 줄줄이 털어놓자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가 조용히 덧붙였다. “귀여니도, 김종국도, MC스나이퍼도, 김세정도 전부 안양이 고향이 아니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마저도 좋았다. 불필요한 정통성 따위가 없어 오히려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그래서 “나는 경기도 안양의 이준영이다” 같은 뜻과 기원을 알 수 없는 문장마저 한 번에 납득하게 만드는 안양이란 도시의 복잡한 단순함이.

    에디터
    이예지
    일러스트레이터
    조성흠
    복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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