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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의 조던 필 감독이 찾은 공포의 원천

2019.05.23GQ

당대의 호러 영화를 보면 그 시대의 불안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가장 미국적인 호러 영화를 만드는 조던 필 감독은 공포는 타자가 아닌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왜 호러 영화를 볼까? 프로이트의 ‘포르트-다’ 게임을 생각해 보자. 어린 아이가 실패를 던져 보이지 않으면 “포르트”라고 외치고, 다시 잡아당겨 보이면 “다”라고 외치는 놀이 말이다. 아이에게 부재의 순간은 분명한 고통이지만, 곧 장난감이 다시 등장하는 극적인 순간으로 이어진다.

호러의 작동 원리는 은폐되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데 있다.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몇 차례 모습을 보이고, 다시 은폐되고, 기어이 나타나는 과정. 낯선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 괴물, 살인마, 귀신, 집단적인 광기 등 은폐된 악이 그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과정 말이다. 이러한 ‘정체를 드러냄’을 지연시키는 것이 쾌감으로서의 서스펜스다. 사람들은 현실의 불안을 잊기 위해 메타적인 불안에 몰두한다. 동일시된 주인공의 생존, 회복, 나아가 영화와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간의 안전한 분리를 통해 안도감을 선사하는 것이 호러 텍스트의 전통이다.

하지만 조던 필의 세계에서 동일시와 분리의 과정은 조금 특별하다. 관객은 <겟아웃>의 최면 의자에 앉혀진 동시에 앉혀진 인물을 관람하며, 원본과 복제를 뒤섞어 내가 동일시해온 주인공이 가해의 입장인지, 피해의 입장인지를 뒤흔든다. 첫 번째 작품 <겟아웃>에서는 흑인과 백인이라는 명백한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존재한다. 관객에 따라 이입할 수 있는 경계가 먼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조던 필은 일단 최면 의자에 관객을 앉히고, 흑인의 시야로 세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을 관음하는 백인들의 시선으로 괴리를 발생시킨다. 두 번째 작품 <어스>에서는 지상의 인간과 지하의 도플갱어의 정체를 최종적으로 뒤바꿔놓음으로써, 여태껏 동일시해왔던 주인공에 대한 괴리감과 동시에 저항해왔던 안타고니스트에 대한 동일시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곧, 당신 자신을 기득권으로 고정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말하자면, 조던 필은 명백히 존재하는 현실의 계급성을 직시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속의 당신의 자리에 대해 묻는다. 자리를, 계급을,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는 일종의 권유가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다. 그의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공포는 계급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조던 필은 첫 번째 작품에서는 계급적 억압에 대해, 두 번째 작품에서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에 대해 말했다.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억압된 것은 때로 반드시 귀환한다. 적의 모습으로, 때로는 자신과 닮은 형태로. 사회 구조에서 미끄러지고 은폐된 것들은 환영으로라도 나타나 어둡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도플갱어는 어떤 무시무시한 외계의 괴물보다도 직접적인 은유다. 익숙한 것이 낯설게 출현할 때, 우리는 모르는 것을 볼 때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가 ‘언캐니’라 표현한 그것이다. 안락한 규범 안에 있던 것들이 생경한 양상으로 돌아올 때, 믿어왔던 것이 와해될 때, 이를테면 내 안에 인지하지 못했던 악 혹은 나 자신의 얼굴을 한 타자를 마주할 때.

도플갱어 모티프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공포의 상징으로, 19세기 초반 독일 낭만주의 문학 <지벤케스>에 첫 등장한 이래 에른스트 호프만의 <모래사나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지킬박사와 하이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나 아닌 나로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해왔다. 나에게서 탈락된 나, 억압된 나, 혹은 내 자리를 위협하는 나로서. 차가운 지하에 갇혀 있던 그들은 속삭인다. 우리는 같은 인간인데,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왜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을까? 장 루이 뢰트라의 <영화의 환상성>을 인용하면, “타자가 나의 분신이 아니라 자아가 타자의 분신인 것이다.” 같은 내가 둘이라면, 나는 내가 원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스>는 원본과 복제를 뒤집어버린다. 그 전복은 역설적으로 평등과 모두의 존엄성에 대해 말한다.

<어스>의 도플갱어가 무엇보다 흥미로운 까닭은 이들이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억압과 배제로 인해 만들어진 또 다른 나 자신이지만, 모호한 추상이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실체다. 당신들은 누구냐는 질문에 도플갱어는 대답한다. “우리는 미국인이야.” 이 대사는 우리(us), 그리고 미국(U.S.)을 동시에 가리킨다. 이것은 명징한 실체로서의 공포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우리 아닌 것을 배제한다. 조던 필은 여기에 의문을 던진다. 공포는 정말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일까?

전복을 꿈꾼 도플갱어들은 붉은 옷을 입고 가위를 든 채 지상으로 나간다. 그리고 서로 손을 맞잡고 인간 띠를 형성한다. 1986년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시행했던 모금 운동인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의 모방 행위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난민의 행렬 같기도 하고,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세워진 장벽 같기도 하다. 조던 필의 공포는 현대 미국의 명확한 구조적 문제와 계급 간의 갈등 속에서, 이민자와 다른 인종이라는 타자에 대해 내면화된 혐오와 배제 속에서, 구체적인 양상으로 출현한다. 가장 익숙한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하고 말이다.

최근의 호러 영화는 점점 더 좁고 선명해지고 있다. 소리를 금하거나(<콰이어트 플레이스>) 보는 것을 금지하고(<버드박스>), 인형(<애나벨>)이나 유령의 집(<컨저링>) 혹은 어떤 특정한 날(<해피 데스데이>)에 공포를 가둔다. 한정된 감각, 혹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설정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 혹은 대상을 맞이한 인간의 철저한 무력함을 보여주며, 장르로서의 호러의 쾌감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반면, 조던 필의 공포는 펼쳐져 있다. 그는 공포가 불가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구조에서 문제를 찾는다. 조던 필의 호러는 공포의 정체가 드러남에 따라 SF의 성격에 가까워진다. <겟아웃>의 기묘한 백인 가정은 건강한 흑인의 몸을 물리적으로 탈취하려는 족속이었고, <어스>의 도플갱어들은 오컬트적 존재가 아닌 미국 정부의 실험 실패로 탄생한 실체 있는 존재였다. 조던 필의 공포에는 이유가 있다. 공포의 발원지는 설명되지 않는 낯선 타자가 아니라,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는 데 있다는 것이다. 조던 필의 작품은 세계관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으나, 그의 영화들은 가상이지만 진짜 같은, 공들여 만든 세계관으로 관객들을 설득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가상임을 명확히 주지하며 그 안의 메타포를 우화적으로 활용한다. 그의 영화가 결국 SF가 아니라 호러인 까닭이다.

조던 필이라는 신예의 등장을 호러 스릴러의 대가인 히치콕에 비견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오히려 그는 어떤 새로운 기획으로 콘셉추얼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영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M. 나이트 샤말란에 가깝다. 호러 영화 마니아인 조던 필은 <어스>에 수많은 오마주를 심어놨다. 가장 친숙한 인물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과 주위의 평범하고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공격을 퍼붓는 히치콕의 <새> 모티프부터, 내가 아닌 나로서 병리학적인 도플갱어가 등장하는 <장화, 홍련>, <블랙스완>, <퍼펙트 블루>에서 나와 나 아닌 나의 팽팽한 대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주인공을 집요하게 쫓는 <팔로우>의 서스펜스, 그리고 후반의 반전으로 세계관을 완성하는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센스> 구조까지.

영리한 기획과 풍성한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탄생한 <어스>는 사실 호러 영화로 따지자면, 무섭지 않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는 게 최근 호러 영화가 앞세우는 캐치프레이즈라면, 조던 필 감독의 등장은 그 말에 확실히 걸맞은 것이다. 끔찍한 괴물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찌르거나 자르는 장면은 누구라도 보여 줄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현대 사회의 공포가 단순히 외부에 대한 공포와 신체의 고통으로 환원되지 않는, 더 복잡한 알레고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겟아웃>과 <어스>에서는 호러 영화로서 무시무시하게 소름 끼치는 장면을 딱히 꼽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 현대 미국 사회의 공포를 직관적인 기획으로 관통하는 조던 필 감독의 영화는 피와 살, 괴물과 혼령 없이도 무섭다. 혐오와 배제, 그것이 지금 우리의 얼굴을 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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