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프랭크 게리의 건축

2019.11.27GQ

프랭크 게리의 건축을 경외하게 만드는 힘은 지치지 않는 에너지와 끝까지 관철하는 반항심에 있다.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 노년의 건축가는, 아직 박제되기에는 이르다.

프랑스 파리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세상에는 그 반례가 얼마든지 존재함에도 우리가 ‘건축’의 기본이라고 굳게 믿는 형태적 특질이 있다. 그것의 대부분에 ‘직선’이 관여한다. 각도. 평면. 분할. 비례. 가장 이성적이고 견고하고 효율적인 단위들. 완벽하게 정돈된 그리드의 세계를 뒤트는 건축물은, 그래서 언제나 생경한 경외심과 모종의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렘 쿨하스, 피터 아이젠만, 데이비드 치퍼필드에서 자하 하디드까지, 소위 ‘해체주의’로 구분되는 일군의 건축가가 일구어온 세계 말이다.

그 가운데서도 프랭크 게리의 세계관은 단연 압도적이다. 그는 건축의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기술적 측면의 한계까지 뛰어넘는다. 통념상의 건축가이기보다는 건축의 기법을 써서 조각을 지어 올리는 분방한 예술가, 때론 재료와 빛과 대기의 상관관계에 집착하는 괴짜 물리학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온갖 금속과 종이와 헝겊을 가져다 직접 손으로 건축 모형을 만들고 그림자 윤곽을 따서 입면도를 그리는, 소위 ’미켈란젤로 시대’의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오랜 세월 프랭크 게리와 교류한 저널리스트이자 큐레이터 밀프레드 프리드먼은 1978년에 지은 산타모니카 게리 레지던스에 대해 “이후 모든 것의 씨앗을 품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 작은 핑크색 저택 이후 오늘날까지 40여 년의 여정 동안 그의 완성작 목록을 채운 수많은 작품은 하나같이 강렬하고 몽환적이었다. 매끈한 몸통의 물고기, 똬리를 튼 뱀, 활짝 핀 강철 장미, 춤추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 파도 위로 고개를 내민 고래나 돛폭 가득 해풍을 머금고 질주하는 범선의 항해를 연상케 하는 그의 건물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존재하는 차원을 유유히 지나 홀로 다른 차원에 안착한 풍경처럼 보인다.

프랭크 게리의 포트폴리오를 나열해보면 대번에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푸른 들판 위에 새하얀 조각처럼 서 있는 바일 암 라인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1989년),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한 쌍안경 모양 게이트와 조화를 이룬 캘리포니아 베니스의 치애트/데이 광고회사 빌딩(1991), 프라하 도심에서 유머러스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댄싱 하우스(1996)나 베를린 DZ 방크 빌딩 내부의 초현실적인 중앙홀(2000)이 예술가적 위트와 독자적인 조형미의 초창기 모습에 속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아트 뮤지엄(1993)에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1997)으로 이어져 정점을 찍고 수많은 논란과 잡음 속에서도 아름답게 완성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03)은 엔지니어링적 완성도가 합세한 ‘완전체’의 형상을 보여준다. 특히 현대 건축의 확고한 기념비적 작품이 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엔지니어링과 시공 기술, 괴짜 건축가를 사랑한 클라이언트의 완벽한 합작으로 탄생한 걸작이다.

‘뉴욕 바이 게리’라 불리는 비크맨 타워.

그의 스케치는 늘 지시사항이 아닌 ‘제스처’를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시공 현장에서는 언제나 볼멘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건축주인 구겐하임의 톰 크랜스 관장은 오히려 빌바오에서 그가 현장에 타협하지 않고 더 멀리, 더 끝까지 자기 성향을 밀어붙이기를 원했다. “확 다르게 만들어봐. 정면으로 대들어서 말야! 라이트(구겐하임 뉴욕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 공간을 아주 많이 만들자고. 우린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프랭크 게리는 당시의 회고를 이렇게 옮겨 적었다. “일단 피의 맛을 보면 멈출 수가 없다. 나는 그게 어디로 가서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했다. 구조를 아주 많이 비틀고서도 여전히 구조물일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해내는’ 것. ‘그냥 해치우는’ 방식. 바로 이게 프랭크 게리의 지향이고, 수많은 비평가로부터 험난하게 비난받는 단초를 제공하는 그만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룰에 천착했다면 0.38 밀리미터 두께의 얇고 섬세한 티타늄 외피 3만 장이 바람의 흐름을 따라 율동하거나, 여명에서 황혼까지 시시각각 다양한 색채의 빛을 반사하는 장관은 애초에 인류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면을 그릴 때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게 아름다운 건물임을 금방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건물을 어디서도 본 적 없다. 그건 그냥 생겨났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흘러나왔다.” 구겐하임 빌바오는 이 프로젝트에 프랭크 게리를 끌어들인 눈 밝은 이들의 기대처럼 쇠락하던 산업 도시를 부활시키는 완벽한 전기가 됐다. 이 시점에서 프랭크 게리의 건축 또한 더 이상의 논란이 무의미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성취를 획득한 후에도, 도대체 소강이나 안주라는 것을 모르는 이 노장은 더욱 많은 작업에 열중했다. 프랭크 게리는 2000년대 내내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며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2004), 마르타 허포드 뮤지엄(2005), IAC 빌딩(2007), 온타리오 아트갤러리(2008), 루 루보 브레인 헬스 센터(2010), 뉴월드 센터(2011) 등을 쉴 새 없이 지어 올리면서 여든을 넘겼다. 제2 혹은 제3, 아니, 부러 몇 번째의 전성기라고 이름 붙이기도 무색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프랭크 게리의 긴 작업 리스트 앞에서 일찍이 1989년 수상한 프리츠커는 빼곡한 책 속의 작은 구두점 하나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현장에서 자신의 충동적이고 과감한 성향을 뒤로 물린 적이 없다. 간섭이 많고 자신의 신념과 부딪히는 클라이언트에게는 곧 흥미를 잃곤 했다. 프랭크 게리의 표현대로 그런 프로젝트는 “완공은 되지만 그 안에 영혼은 없는 덩어리”가 되고 만다. 수많은 현실적 한계와 관계 역학을 딛고 살아남은 작품은 건축과 예술 사이의 스펙트럼을 자유롭게 오가며 오래도록 찬란한 생동감을 뿜어낸다. 근대 이후 마치 금단의 경계라도 있는 듯 여겨져 온 건축적 실험과 예술성의 경계는 어쩌면, 관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프랭크 게리 본인도 말했듯 단지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갈라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은 도시의 스케일 때문에 애를 먹는다. 아무도 예술가에게 60층짜리 조각 작품을 만들라고 의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60층짜리 조각을 만들기 전에는 예술가의 작품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옆에 놓이거나 어떤 획기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겐하임을 회고하며 그가 적은 글의 일부다. 그래서 자신의 조각품을 마천루와 견줄 스케일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일까. 예언의 실현처럼, 그는 2011년 자신의 첫 마천루 빌딩 ‘뉴욕 바이 게리’를 맨해튼 한복판에 76층 높이로 지어 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건축보다는 예술에 더 관대하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을 어떤 영역의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뉴욕 바이 게리를 포함한 그의 모든 건축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주 먼 과거엔 결국 예술가가 건축을 했다.

건축가와 건축주로 만나 게리와 오랜 우정을 나눈 치애트/데이의 창립자 제이 치애트가 농담처럼 예견했듯, 게리의 진짜 ‘피크’는 아흔을 목전에 두고 찾아왔다. 구겐하임 빌바오의 톰 크랜스가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과감함과 무경계성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한 클라이언트와 함께 말이다. 2014년 완공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프랭크 게리의 건축사에서 가장 균형 잡힌 조형미를 뽐내는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LVMH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의 회장이자 CEO인 베르나르 아르노와 프랭크 게리의 만남은 2001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자크 랑 문화부 장관 휘하에서 프랑스의 문화 정책을 이끌다 LVMH에 합류한 장 폴 클라베리와 함께 빌바오를 찾아 구겐하임 미술관을 둘러본 아르노 회장은 곧장 그 경이로운 광경에 매료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프랭크 게리와 아르노는 뉴욕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이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근하고 견고하게 쌓아 올린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파리 서쪽 외곽에 자리한 불로뉴 숲속의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 꽃을 피웠다. 3,300평 면적의 부지에 세워진 거대한 유리 돛 형상의 파빌리온 열두 개는 갤러리 기능에 충실한 평면 공간 위를 하얀 섬유 보강 콘크리트로 덮어씌운 뒤, 그 위에 구부러진 유리 구조물을 설치해 완성했다. 주된 비판의 포인트이기도 했던 건축물의 기능적 측면을 제대로 살려내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밀고 나간 모양새다. 이 시점에서 그의 건축은 스스로의 종합적 완성도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린 듯 보인다.

다음 해인 2015년 완공된 페이스북의 먼로 파크 캠퍼스는 저층으로 넓게 포진한 형상과 직선적인 디자인이 언뜻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외모를 지녔다. 내부로 들어서야 이 천재 건축가가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그 안엔 마치 미토콘드리아의 내부처럼, 완전한 비정형의 유기성을 가진 공간이 펼쳐진다. 페이스북의 기업 정신과 공간의 조형미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풍경이다. 이 건축물은 실은 탁 트인 4,400평짜리 ‘방’이다. 3천여 명의 직원이 벽이나 문에 가로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개방형 구조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혼선이나 불안감을 조장하지 않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뉴욕 하이라인을 떠다 캘리포니아 바이브를 살짝 뿌려 부풀려둔 것 같은 너른 옥상 공원의 난간에 기대 서면 인스타그램이 들어서 있는 페이스북 구사옥이 맞은편에 멀찍이 보인다. 아흔을 넘긴 노장의 머릿속에 딱딱한 통념은 여전히 끼어들 자리가 없다.

로스엔젤레스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현재의 프랭크 게리는 말년의 피카소를 연상시킨다. 노년에 이르러 더 많은 세계를 수용하고 무르익은 에너지를 왕성하게 뿜어내는 예술가. 박제되기엔 아직 이른 현재진행형. 10월 31일,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열 루이 비통 메종 서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기존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를 기반으로 새로 만든 이 메종은 조형과 기능에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DNA를 충실하게 공유한다. 마치 얼어붙은 빛의 덩어리에서 잘라낸 섬세한 한 장의 슬라이스처럼, 루이 비통 메종 서울도 콤팩트한 규모 속에 프랭크 게리 건축이 갖는 위트와 정수를 온전히 담고 있다. 마치 먼 바다 위를 질주하는 범선의 돛 한 자락이 사뿐히 나부끼며 이곳 도심에 내려앉은 모양새다.

프랭크 게리는 이번에도 단정한 육면체의 공간 위에 형태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조형을 빚어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을 수차례 오가며 곳곳의 생경한 정서를 몸소 체험하고 흡수한 그는 수원 화성의 아기자기한 포루들과 부산의 동래학춤에서 메종 서울의 이미지를 획득했다고 말한다. 둥글면서 견고한 육면체 위에 마치 모자처럼 지붕을 얹은 화성의 서포루나 동포루가 메종의 구조적인 틀이
라면, 그 위를 장식한 유리 조형물의 율동감은 검은 갓에 흰 도포를 입은 사내들이 우아하고 섬세한 학의 몸놀림을 흉내 낼 때 힘 있게 나부끼며 공간을 가르는 도포 자락의 날카로운 선을 닮았다.

루이 비통 메종 서울.

가장 단단한 재료로 거의 영구적인 오브제를 만들면서 찰나에만 존재하는 춤의 선을 표현해내는 그의 작업은, 자신의 주방에 유리와 목재 프레임으로 큐비즘적인 공간을 창조했던 1978년의 기세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랭크 게리는 여전히 힘이 넘치고, 끝까지 관철한다. 오랜 시간 성실하게 다듬고 축적해온 장인적 미학은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의 쇼윈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그가 다채로운 색이 돋보이는 나무 형태의 종이 조각 조형물을 만들어 쇼윈도를 꾸밀 예정이다. 사람의 손으로 몇 번씩 종이를 구긴 듯한 조형물에선 유리와 철골의 고정된 형태에 자유성을 부여해온 거장의 고유한 스타일이 느껴진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프랭크 게리라는 장르는 아마도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진화할 것이다. 그를 직선의 세계에서 일탈시킨 포스트 모더니즘이 선물한 물고기 모티프처럼 그의 건축은 매번 완성 직전의 순간까지도 변화를 갈망했다. 경계 따윈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 예술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치고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프랭크 게리는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마주한 것처럼 우리는 다시 새로운 충격과 감탄의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글 / 유희영(크리에이티브 컨설팅 에이전시 JAD 미디어 디렉터)

만남과 만남
루이 비통의 행보에는 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인 여행의 예술은 라이프스타일과도 랑데부를 이뤘다. 2012년 첫선을 보인 한정판 가구 컬렉션 오브제 노마드는 마르셀 반더스, 캄파나 형제 등 공예와 산업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손꼽히는 디자이너들과 교감하며 다채로운 작품을 발표했다. 독창성과 장인의 노하우, 시적인 감성이 훌륭하게 짝을 이룬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이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을 통해 소개된다.

아틀리에 오이 Atelier Oï의 스툴.

캄파나 Campana 형제의 봄보카 소파.

로우 에지스 Raw Edges의 콘서티나 체어.

인디아 마다비 India Mahdavi의 탈리스만 테이블.

마르셀 반더스 Marcel Wanders의 룬 체어.

안드레 푸 André Fu의 리본 댄스 소파.

    에디터
    김영재
    사진
    Ⓒ Todd Eberle for Fondation Louis Vuitton, 2014., Gettyimageskorea, Courtesy of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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