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무섭지 않게 가을로

2012.09.28GQ

올여름이 무더웠던 이유가, 무서운 공포영화가 없어서였을까?

지난 6월, 무더위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기획회의에선 ‘올해 여름 공포영화’를 다뤄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선 개봉 예정작들을 모아야 했다. 하지만 모이지가 않았다. 외화까지 더해봐도 부족했다. 한국영화 중에는 5월 30일에 일찍 선수를 친 <미확인 동영상: 절대클릭금지>를 제외하면 <두 개의 달>과 <무서운 이야기>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다. 호러 가뭄은 2008년부터 계속되어 온 현상이다. 그해 한국 공포영화는 <고死 : 피의 중간고사>와 <외톨이>, 단 2편이었다.(스릴러에 양다리를 걸친 <GP 506>을 포함한다면 3편.) 2009년에도 4편(<여고괴담 5>, <요가학원>, <불신지옥> <4교시 추리영역>), 2010년에도 4편(<고死 두 번째 이야기: 교생실습>, <폐가>, <귀>, <마녀의 관>), 2011년에도 3편(<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 <기생령>)이 전부였다. 1998년 <여고괴담>, 2002년 <폰>, 2003년 <장화, 홍련> 등의 성공을 시작으로 일었던 호러 붐이 완전히 잦아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태용, 민규동, 안병기와 같은 새로운 이름의 발견도 멈췄다. 호러가 신인들의 등용문이라는 것도 옛말이 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한, 충분히 예상 가능한 답안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호러란 장르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데, 다들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다. “막상 찍어보면 다른 장르에 비해 저예산도 아니고,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기도 쉽지 않고, 한국 시장에 적용 가능한 하위 장르의 폭도 넓지 않다. 그러니 비록 성공한 전례가 있다 해도, 신인을 기용해 적은 돈 들여서 재미 좀 보려 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경험자들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것이 상업 장르로서의 호러에 관한 내재적 방정식이라면, 외재적 방정식의 연산도 가능할 것 같다. 질문을 바꿔본다면 말이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호러의 기능을 대신해온 장르는 무엇인가. 지난 몇 년간 관객들이 선택해온 바를 따르자면, 그 답은 ‘스릴러’다. 호러의 ‘빼기’와 스릴러의 ‘더하기’로 유지된 등식. 호러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시기는 스릴러의 버블 경제기가 시작된 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2000년 전후로 일련의 호러 성공 사례들이 발표된 뒤, 2006년까지 편수나 관객수 에서 호러는 매년 스릴러를 조금 앞지르거나 비슷한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2007년 박스오피스 50위권 통계를 살펴보면 호러는 4편으로 310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친 반면, 스릴러는 6편으로 1069만 명을 동원했으며 그중 3편이 10위 안에 있었다. <추격자>가 나온 2008년에는 그 격차가 더 벌어졌다.

충무로에서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팔할이 스릴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2010년에는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스릴러 중에서는 <아저씨>, <이끼>, <악마를 보았다>, <황해> 등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점령한 영화들이 다수 나왔으나, 호러 중에서는 100만 명을 넘긴 영화조차 없었다. 2011년에도 79만 명이 든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가 최고로 흥행한 호러였고, <미확인 동영상: 절대클릭금지>가 86만 명을 동원한 것이 최고인 올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인의 발견 혹은 재발견도 호러가 아닌 스릴러의 몫이 됐다. 그렇다면 한국 관객이 보기에 스릴러의 무엇이 재미있어졌고 호러의 무엇이 재미없어진 것일까.

최근 개봉작 중 <연가시>와 이전에 나온 몇몇 영화에 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인터넷에서 떠돌았던 곱등이 괴담을 바탕으로 한 <연가시>는 호러도 아닌 것이 줄기차게 ‘공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그 공포를 작동시키는 이야기의 구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유비하는 현실의 구조가 <괴물>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정한석 영화평론가가 지적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허문영 영화평론가도 <괴물>의 괴물과 <추격자>의 지영민이 지닌 공통점으로부터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두 괴물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도출해낸 바 있다. 거기서 한 가지 단어를 빌려오면 좋을 것 같다. 바로 <연가시>-<괴물>-<추격자>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로서의 ‘괴물’이다.

한국영화에서 스릴러를 호러보다 막강한 장르로 만든 주인공이 바로 그 괴물들이다. 그 괴물들은 어떤 귀신들보다 강력하다. 가령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구천을 떠도는 소녀나 이승과 저승의 시간을 임의대로 오가는 살인마보다는 <추격자>의 지영민이라는 살인마가, <괴물>에서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이, <연가시>에서 인간의 영혼까지 지배하는 기생충이 훨씬 섬뜩하다. 이때 섬뜩함의 흐름이 중요하다. 원혼들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 사연들을 지녔으며, 명백한 환영으로서만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 중 대개는 위령의 서사를 통해 정상 상태를 되찾을 수 있다. 괴물들은 다르다. 누군가가 ‘그 장면에서 괴물은 왜 그러는 거야?’라고 물으면 다른 누군가는 ‘괴물이니까’라고 대답한다. 괴물은 (외교재앙부터 자연재해, 성범죄자, 연쇄살인마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은밀하고 긴밀한 상호 텍스트성을 갖고 있으나 동어반복의 수사를 통해 그 사실을 숨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해를 거부하는 존재들이 되어버리고, 동시에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겨두는 편을 택해온 대중의 공모자적 무의식을 건드리게 된다. 그 관계성을 폭로하지 않는 한 정상 상태로의 복귀는 어렵다. 이 ‘이해불능’의 코드가 괴물을 괴물이게 하며, 괴물을 귀신보다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괴물들은 최근 스릴러에서 가파른 속도로 증식해왔다. 나홍진의 <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악마를 보았다>, <용서는 없다>, <아저씨>,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등에서 불가해한 괴물들의 번식은 계속되었다.

괴물은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무서우면서 매혹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귀신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식상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에서 귀신 자체가 멸종위기다. 귀신을 공정하는 데 가졌던 호러 감독들의 애착과 노력은 이제 스릴러 감독들에게서 발견된다. 스릴러 감독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려는 괴물의 비주얼을 완성하는 데 각별한 공을 들인다. 영화는 괴물들의 생리부터 전사, 공격 방식, 전리품을 전시하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관객들은 거기서 비롯되는 공포를 즐긴다. 반면 호러 감독들은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에 굉장한 부담을 느끼는 듯하며, 귀신을 직접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을 찾는 데 더 열심이다. 그러니 가공된 초자연적 현상과 직접 대면시키는 인공 오락물로서의 호러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국 공포영화가 차지한 좁은 땅에는 시각적 안일함을 메우기 위해 청각적 놀람 효과만 강조한 ‘귀신 없는 귀신의 집’들만이 난립하게 되었다.

스릴러가 호러를 대신할 만큼 쾌락을 제공하고 호러에서 귀신의 행방이 묘연해진 지금, 스릴러와 호러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영화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연쇄살인마의 보험사기극을 소재로 한 <검은 집>이나 집단 성폭행 사건을 외딴 집에 암매장해놓은 <베스트셀러> 등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개봉한 <이웃사람>도 애매하게 호러를 기웃거린다. 하지만 스릴러가 호러를 흡수하거나 대체했다는 식의 결론은 섣부르다. 두 장르의 규칙이나 형식미를 엄밀히 구분하는 일이 때로는 무용할 수 있다. 스릴러와 호러는 인간의 공포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원래 친밀도가 높다. 거기다 호러는 스릴러뿐 아니라 SF나 재난영화와의 짝짓기에도 능하다. 공포를 의미하는 단어 포비아Phobia가 수많은 다른 단어들의 꼬리에 붙어 새로운 단어로 파생하듯이 말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충무로에서 호러가 해온 역할을 스릴러가 대신하고 있을 때 그것은 어떤 대중적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인가. 우리가 귀신보다 괴물을 더 두려워하지만 더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한동안 무책임한 죽음의 목격자가 될 수밖에 없진 않을까?

    에디터
    이후경(<씨네21> 기자)
    아트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션 김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