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하고 지루하던 패키지 여행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자유 여행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패키지 투어의 별별 선구안.
세상에는 패키지 여행을 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 문장은 ‘개과와 고양이과’ 식의 분류보다 그럴듯해 보인다. 패키지 여행을 대하는 태도에 중간은 없기 때문이다. 노련한 경험자가 계획한 코스를 안전하게 따를 것인가, 우연과 고난의 개입을 즐기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선택할 것인가? 패키지 여행의 양자택일에는 인생과 여행에 대한 관점, 경험과 기질, 소속된 세대가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 모든 면에서 나는 후자에 속한다. 자유 여행의 열풍이 일기 시작할 즈음 20대를 보냈고, 낯선 지역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검색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 여행 경험의 절반 이상은 패키지 여행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내가 여행 기자였기 때문이다. 여행 기자의 출장에서 모든 일정은 일방적으로 정해진다. 이동 시간부터 식당과 술집, 감격의 순간까지도 계획되어 있다.
직업적 패키지 여행을 떠올리면 멋진 기억들이 차례로 되감긴다. 가장 빈번하게 방문한 도시는 홍콩이다. 미식부터 하이킹까지 출장의 주제는 매번 달랐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곳의 표정을 새롭게 목격하는 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게다가 그 과정은 지극히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오랫동안 서민들의 주거지였던 삼수이포는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동네지만, 이곳의 진정한 보석들은 좁다란 뒷골목 곳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관광청에서 미리 제안한 경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저 혼잡한 거리와 낯선 광둥어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서호주처럼 광대한 땅으로 출장을 떠났을 때도 계획의 편리는 빛났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신대륙의 가장 경이로운 풍경들은 드넓은 대지 곳곳에 외롭게 흩어져 있다. 그 경치를 두 눈에 담고 싶을 때 가장 큰 고민은 이동 수단이다. 대중교통이 존재할 수 없는 황야를 몇 시간 동안 달려, 아주 특별한 장소들에 닿고 또 닿았다. 사막 한가운데 돋아난 피나클 지형부터 짙은 핑크빛 산호초까지, 가이드와 차량, 적절한 동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경험이 많았다. 낯선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 다니며 가이드의 안내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게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해도, 결국 패키지 여행의 형식이 품은 효율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행 상품을 ‘수박 겉핥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쩌면 처음 가보는 지역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는 패키지 여행이 가장 적합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기자가 아닌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나는 패키지 여행을 선택할 수 있을까?
2000년대 이후 패키지 여행 산업은 계속 몰락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정보 유통 구조의 변화는 여행 업계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소수의 가이드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제는 몇 차례의 검색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경험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개인적 취향의 영향력 또한 높아졌다. 가격 경쟁력을 올리고 더 많은 수익을 거두기 위해 특정 호텔이나 상업 시설과 맺은 계약으로 여정을 구성하던 여행 업계의 태만함 또한 무시할 수 없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패키지 투어는 해외여행의 거의 유일한 통로였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 그 위상은 한없이 추락했다. 고루하고 자유를 만끽할 여지조차 없는 옛날식 여행. 뚜렷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패키지 여행의 시대는 끝장난 것일까?
얼마 전 이 질문을 정확하게 던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H 여행사에서 일하는 A 씨를 만난 자리였다. 10년 넘도록 투어 기획을 해온 전문가의 대답은 짧은 한숨으로 시작되었다. “슬픈 얘기지만, 저는 패키지 여행 산업의 미래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진 않아요. 여행 트렌드와 업계의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확신은 있어요. 수요의 변화는 있겠지만, 적어도 패키지 여행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지금 20대는 패키지 여행을 택하지 않죠. 의사소통 능력이 있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가치를 두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40, 50대가 되면 패키지 여행을 찾아요. 경제적 여건이 허락된다면 결국 사람은 좀 더 편한 것을 택하게 되니까요.” 패키지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비용과 시간의 효율이다. 동일한 여정으로 자유 여행을 하는 경우 패키지 여행에 비해 더 많은 경비가 들지만, 기획의 수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 비용 자체는 패키지 상품이 높을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점점 줄어들고 패키지 여행의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은 연령대에 진입하면 사람들이 다시 패키지 여행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낙관만 믿고 있기엔 여행 산업이 너무 크게 요동치고 있다.
“지속적인 답사와 취재를 통해 깊이 있는 일정을 구성하고,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상품에 녹일 수 있다는 것도 패키지 여행의 장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짠 일정은 결국 여행 상품 홍보를 통해 노출하게 되죠. 젊은 세대가 그 일정을 참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고요.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패키지 여행의 또 다른 형태가 테일러 메이드 투어예요.” 테일러 메이드 투어는 말 그대로 여행자의 요구에 따라 일정을 구성하는 여행이다. 이미 15년 여 전부터 유럽 여행사들은 다양한 테일러 메이드 투어를 선보여왔다. 지프로 아프리카의 평원을 가로지르며 친구들과 떠나는 사파리 글램핑, 극지방까지 향하는 항해 여행 등도 테일러 메이드 투어 형식으로 가능하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여행의 로망이 완벽하고 안전하게 성취되는 셈이다.
세렝게티나 남극은 아니더라도, H 여행사는 이미 여러 차례 흥미로운 테일러 메이드 투어를 진행했다. “지난해 봄 25명 정도 인원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여행을 구성했어요. 50대 이상 여자분들이 친구들끼리 떠난 여행이었는데, 인원 구성과 지역까지 정확하게 정한 후 연락을 주셨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자유 여행으로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여행지예요. 그리스 에게해에는 섬이 많기 때문에 육로와 해로, 크루즈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동선과 일정도 쉽지 않고요. 여행의 목적과 가고 싶은 지역들을 들은 후, 여정과 숙소,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춘 한국인 가이드, 작은 동네의 훌륭한 식당을 선정하는 것까지 제안을 드렸어요. 여행 업계에 일한다 해도 가기 어려운 지역인데, 투어를 계획하는 일 지체가 즐거운 모험이었죠.” 피스타치오 나무들 너머 고적한 절벽 위에 버려진 그리스 신전들, 피레우스 항구에 남아 있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옛집, 모넴바시아섬의 절벽 아래 조용한 해변에 위치한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의 카페… 투어를 위해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고전들을 다시 공부한 전문 투어 가이드의 열렬한 해설이 함께했고, 복잡한 일정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성공한 테일러 메이드 투어에서 여행사는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컨시어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런 여행의 단점은 역시 높은 가격이겠지요. 인원수가 많아 자유 여행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가격이라 해도, 절대적 비용 자체가 커요. 그래서 테일러 메이드 투어는 연령이 높은 분들이 많이 찾는 편이에요.” 테일러 메이드 투어 이외에도 패키지 여행의 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전문가나 인플루언서를 대동한 프로그램이다. 유명한 셰프와 함께 떠나는 미식 여행, 미술 전문가와 함께 미술 박람회의 VIP 기간을 둘러보는 투어 등은 자유 여행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전문성과 흥분, 경험을 품는다.
젊은 시절의 우리는 생각한다. 여행은 계획과 우연, 고난과 기쁨이 함께 자아내는 태피스트리 같은 것이라고. 패키지 여행은 돈을 들여 뻔한 시간을 보내는 선택일 뿐이라고.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보다 나이가 든 지금, 나는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왜 여행은 특별한 경험이어야 하지? 힘겹고 불안한 여정을 일부러 택하곤 그 후일담에서 반드시 깨달음을 길어내려는 욕망도 참 이상한 것 아닐까? 여행에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움만 즐기면 안 될까? 쌓이는 업무로 여가 시간은 부족하기만 하고 힘겹게 번 돈이 잔고에 어느 정도 쌓일 즈음, 예측하기 어려운 모험뿐 아니라 안정감과 편안함이 지닌 매력에도 조금씩 마음이 열려갈 즈음, 자신의 상태가 그 시점 위에 있다면 패키지 여행으로 시선을 한번 돌려봐도 좋다. 새롭고 흥미로운 투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기획되고 있으니까. 글 / 정미환(여행 작가)
- 에디터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