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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김지혜 작가 "드라마는 끝나지 않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2022.07.27전희란

<인간실격>은 달콤하게 아프고, 비릿하게 행복하다. 우리 삶 어딘가엔 늘 있지만, 드라마에는 출시된 적 없는 맛들이, 기어코 그곳에 있다.

6화, 강재의 말.

GQ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혹시 작가님이 남자는 아닐까?
JH 아하하하. 제가요?
GQ 워낙 두문불출하는 분으로 알고 있어서요. 인터넷에 정보도 거의 없더라고요.
JH 흔한 이름에 숨어 있었죠. 그런데 <인간실격> 캐스팅 기사가 뜨면서 개그우먼 김지혜 씨보다 제 이름이 먼저 검색이 되는 거예요. 아, 이건 위험하다. 그래서 인물 검색도 내리고, 인터넷에 남아 있는 인적 사항도 모두 지웠어요. 원래 인터뷰도 잘 하지 않고요.
GQ 궁금했어요. 드라마 작가의 일상은 어떤 모양일지.
JH 제 생활로 작가의 일상을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글 쓰는 직업이지만, 다른 일도 해요. 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로 인연이 된 황수아 감독과 함께 뮤직비디오 연출하면서 아트 디렉팅,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기도 하고, 10년째 책 한 권 내지 않은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고···.
GQ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는 분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틀렸네요.
JH 저한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어요. 한 번 태어나서 살다 죽는 인생인데 가능한 기회가 있을 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참여하고 싶어요. 원래 참견하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웃음) 지금은 전시, 공연, 서점이 하나로 된 공간을 만들고 있어요. 작업실을 찾다가 괜찮은 가격에 큰 공간을 얻게 됐거든요. 1층에 뭔가 해볼까? 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단편 소설 작품을 순서대로 모으고, 단편 소설의 한 장면을 라디오 드라마화하고, 오디오로 공연하면서 전시를 볼 수 있는 공간을 구상하게 되었죠. 요즘은 픽션을 읽지 않는 시대잖아요. 그럼에도 나는 픽션을 하는 사람이니까, 픽션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11화, 부정의 말.

GQ 진정한 ‘n잡러’시군요. 베일에 싸인 게 의문일 정도로.
JH <인간실격>을 보고 작가는 진지하고 고상하고, 클래식한, 굉장히 선생님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몰라요. 저는 그 짐작이 손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을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 라는 마음. 좀 더 어릴 때는 많은 필모를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거짓말처럼 나라는 건 없어도 상관없고, 작품만이 남아서 돌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전에 했던 영화들도, <인간실격>도 다음 작품 할 때 서로 너무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해요.
GQ 저는 오히려 기쁜 걸요. 상상과 전혀 다른 인물이라서.
JH (미소)
GQ 드라마 이전에 오랫동안 영화 시나리오를 쓰셨더군요. 처음 ‘쓰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기억나세요?
JH 아주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드라마 작가를 꿈꿨어요. 베스트극장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죠. 첫 번째 꿈이었어요. 엄마 아빠는 전형적인 고학력 도시 빈민이었고, 집에서 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없었어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었죠. 그런데 티브이를 켜면 좋은 드라마가 정말 많았어요. 그때 티브이가 제겐 책이고, 놀이터이고, 문학이었어요.
GQ 첫 입봉작인 영화 <인디안 썸머>에도, <우리집에 왜 왔니>에도, 그리고 이번 <인간실격>에도 죽음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인물이 등장해요. 지금 써도 파격인 소재를 이미 수십 년 전에 쓰신 거예요.

13화, 강재의 말.

JH 저에겐 약간···. 죽음이 있어요.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되었죠. 제 모든 이야기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GQ 그것도 상업 예술에서 말입니다.
JH 상업성이란 게 뭘까? 저는 상업 영화를 하는 사람이니까 생각을 해봤죠. 제가 내린 답은 ‘성장’이었어요. 주인공이 등장해서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행복이 뭐지? 행복은 어느 순간에 오지? 각자 행복의 기준도, 때도 다르지만 ‘머스트’로 오는 순간이 있 다면, 그건 ‘죽음 직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떠한 사람도 죽음 직전에는 반드시 행복이 온다. 그건 어쩌면 희망이었을 수도, 믿음이었을 수도, 바람이었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그런 명제가 제게 있었어요. <인디안 썸머>도, <우리집에 왜 왔니>도 죽음 직전에 존재했던 행복에 대한 이야기죠.
GQ 그리고 마침내, <인간실격>도요.
JH <인간실격> 대본집 후기에도 적었지만 시작은 무척 재능 있고, 너무도 젊고 아름다운 한 사람의 죽음이었어요. 그의 유서와도 같은 마지막 편지가 공개되었고, 저는 그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 편지에 대답을 해주고 싶었어요. 선생님, 그러니까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거죠? 내가 문제라는 거죠? 라는 말에. 그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해주면 될까. 그러다 <인간실격>을 쓰기 시작했죠. 대중 예술을 오래 해왔으니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한테는 그 전투력이 있었어요. 이걸 다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지금 내게는 있다. 그래서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저 역시 여러 번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으로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고, 얼마나 평범한 일이며, 얼마나 당신과 닮은 일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부정이(전도연)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마지막 순간에 분명 행복이 있다, 없을 리 없다, 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잠시 공백) 그런데 없으면 어떡하죠?
GQ 대본을 쓰면서 많이 울고, 웃었다고요.
JH 저는 주로 아침에 작업을 해요. 새벽 5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오늘은 써지는 날인지, 안 써지는 날인지는 아침에 딱 눈을 뜨면 알게 돼요. 아버지가 무슨 대사를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서 막 울어요. 그러면 일어나서 쓰는 거예요. 그 인물이 날 불러줬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 마음을 안고 와서 작업을 해요.

14화, 부정의 말.

GQ ‘불러준다’고요.
JH 네. 그게 아주 평범한 정수(박병은)일 때도 있고요. 꼭 어떤 죽음이나 커다란 깨달음만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날은 한 글자도 안 불러줄 때도 있어요. 저는 부정이가 정말 어려웠어요. 4부까지 썼을 때쯤 전도연 선배 캐스팅이 됐는데, 사실은 그 전부터 전도연 선배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어요. 부정이가 제 안에 있는데, 부정이 자신이 이것이 자기 대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써지지 않아요. 몇 장을 썼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앞으로 돌아가면 ‘부정이가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네’ 깨닫게 되죠. 그런데 전도연 선배도 비슷하더라고요. 대본을 보면서 “나 이거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하다가도 막상 촬영하고 나면 이미 너무 그 사람인 거예요. 대사를 하고 나면 완전히 그것을 아는 거죠. 그분에게는 매 신마다 ‘알고 하면 안 돼’라는 신념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자기 투쟁인 거예요.
GQ <인간실격> 방영 직전 박병은 배우와의 인터뷰가 생각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 “아픔을 대하는 작가님의 방식이 새로웠다”라고 했죠. 겉으로 드러난 표현으로 슬픔의 척도를 가늠할 수는 없다고.
JH 아아아악 비명을 지른다고 해서 많이 아픈 건 아니잖아요. 그건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단지 그것이 쉬운 방식이니까 대중 예술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밖에 없죠. 실제로 대중도 거기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어요. 악 소리도 안 질렀는데 쟤는 왜 아프지? 하거든요. 매체에서 노출되는 신이 사람의 리액션에 영향을 미쳐요. 내가 어떤 유부녀를 극 안에서 어떻게 묘사하면 ‘유부녀가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대중 예술에는 있어요. 그러니까 책임을 더 가져야겠다고 느끼죠. 슬픔 같은 감정을 하나의 알기 쉬운 리액션으로 고정해두면, 서로를 개성 있게 알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주위를 잘 관찰하는 것으로 캐릭터를 파악하려고 하죠. 일단 내가 안 하는 리액션은 인물에게도 안 시켜요.

16화, 부정의 말.

GQ 그러니까 시종 덤덤해 보이는 정수가 사실은 더 슬플 수도 있는 거죠.
JH 저는 누가 A를 물어보면 ‘A가 B여서 C잖아’라는 식으로는 설명을 잘 못 해요. 왠지 이 사람에게 F를 보여주면 A를 이해할 것 같은데? 생각이 들면 F를 보여주죠. 박병은 배우에게 정수를 설명할 때도 그랬어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롱 패딩에 크로스백을 맨 아주 평범한 30대 후반의, 아마도 직장인인 남자를 보았어요. 잘 걸어가다가 잠시 멈춰서 허리를 굽히고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또 걸어가는 거예요. 정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그 일화로 설명해주었죠. 여러 사람에 섞여 있을 때, 관찰되지 않을 때는 어떤 아픔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언제든 서서 한숨을 쉴 만큼 지쳐 있는 사람인 거죠.
GQ 사람을 관찰하는 작가만의 독특한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JH 일단, 모든 사람을 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봐요. 그다음에 다른 걸 찾아가는 편이죠. 모두에겐 기본값이 있다고 믿어요. 저 사람이 흐름상 C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그걸 말할 수 없는 상황도 있고, A라고 말해야 되는 상황도 있죠. 기본값이 있기 때문에 그 리액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예상을 하잖아요. 이 사람의 기본값이 D일 때는 어떤 리액션을 할까? 기본값이 C일 때 A라고 하는 사람, B라고 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정리해서 알아가요. 그렇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 하나의 기본값을 가지고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겠죠. 그게 영 다른 사람은 사회에 나와서 마주치기 어려워요. 모든 것을 액션으로 볼 것인가, 리액션으로 볼 것인가. 저는 극이나 캐릭터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의 리액션에 관심을 가져요.
GQ 관찰의 결과는 뇌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나요?
JH 맞아요. 인덱스로 서랍이 정리되어 있어요. 무언가를 쓸 때 어떤 인물이 어떤 서랍과 탁 만나 새로운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제 안의 어떤 면이 나올 때도 있고요. 그걸 확장하다 보면 누군가와 닮아 있을 때도 있어요. 제가 봤던 사람들, 영화나 소설에서 본 인물들. 기본적으로는 모방이죠. 이전에 훌륭한 사람들이 해놓은 것을 참고하고, 모방하다 보면 또 다른 게 생겨나요. 참고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나중에 보고 비슷하다고 느끼면, 애써 부정하지 않으려 해요.
GQ 작가가 쓰는 모든 인물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나요?
JH 네. 모든 작가가 그렇겠죠.
GQ 이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 이라는 전제는요?
JH 그으으렇게 나쁜 사람은 잘 없죠.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저는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픽션에서 인물을 다룰 때는 상황이 아니라 입장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게 공감의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웃음) 입장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아란(박지영), 진섭(오광록)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도 입장이 있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도 없이 나쁜 사람은 존재하기가 어렵다고 봐요. 없는 걸 굳이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입장을 주는 것, 그런 생각하는 걸 좋아해요. 제 스스로 실패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GQ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요?
JH 가령 제가 무슨 사기를 당했어요. 그래도 ‘나는 사기를 당한 사람이야’라는 데 놔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지금 사기를 당했는데, 자 보자고. 저 사람이 나한테 사기 칠 때 이런 입장이 있어서···. 왜 속았지? 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은 대개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항상 그런 식으로 정신 승리를 해요.

15화, 강재의 말.

GQ “사랑은 큰소리에 파묻힌 작은 소리를 듣는 귀”라는 말을 최근에 어디선가 보았는데, 작가님은 그 작은 소리들을 성실히 수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했어요.
JH 작은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해요. 어떤 사람이 작은 소리를 가지고 있을 때 매력있게 느껴져요. 가령 헤드와 조수가 자기 위치에서 움직이다가 어떤 나사가 탁 하고 소리를 낼 때, 매력적이에요. 그런 소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소리를 듣는 일이 저한테 제일 중요한 일이고, 제 존재의 이유예요. 나한테 신이 뭔가 더 주었다면 작은 소리를 듣는 귀를 주신 게 아닐까 하죠. 잠깐만. 지금 네가 뭔가 얘기한 거 같은데? 이런 발견의 횟수가 확실히 많아요.
GQ 아까 지하철에서 한숨 쉬고 지나간 사람처럼 말이죠.
JH 티브이에 누군가 나와서 너무 뻔한 인터뷰를 하는데, 같은 내용을 어제와는 뭔가 다르게 얘기를 해요. 그렇다면 어제부터 오늘 사이에 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예상하는 걸 좋아해요. 실제로 맞는 경우도 있고. 그런 생각하는 일이 귀찮지 않아요. 다 내 일 같고, 재밌어요.
GQ 써야 할 운명이군요.
JH 쓸 때 제일 좋아요. 행복하다고 느껴요. 대본이 늦어져서 모든 조감독이 연락해 나를 죽일 것처럼 하고, 당장 누가 찾아올 것 같고 미칠 것 같은데도 쓰기 시작하면 행복해요. 죽을 것 같은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생각하죠. 아, 이게 진짜 나를 구원하는 일이구나.
GQ 내면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하고 싶다는 열망과 완벽한 극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 중에 무엇이 이겨요?
JH 영화는 100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두 번 정도의 산을 넘어 결과에 도착해야 해요. 얼마나 산을 넘게 했는가, 영화는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크게 매력을 못 느끼죠. 제 장점이 아니기도 하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너무 좋았던 건, 이 사람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 그걸로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는 거예요. 매 회 주인공인 사람이 있어요. 그게 딱이(유수빈)일 때도, 순규(조은지)일 때도 있죠. 오늘은 이 사람이 주인공인데, 이 사람의 진짜 한 장면을 보여주어서 나도 울고, 보는 사람도 울고, 그런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면 그걸로 됐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나지 않아도 된다고, 끝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물리적인 열린 결말과는 달리 드라마가 어디선가 계속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일. 그것이 진짜 엔딩, 드라마의 끝이라고 생각해요.
GQ 그럼에도 완성도 역시 놓지 못하죠?
JH 제작사에서는 완성도에 너무 고집을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초고가 나오면 그 뒤에 잘 고치지 않아요. 아주 작은 수정만 하는 정도죠. 저를 완전히 끝까지 몰아세워 배수의 진을 친 다음, 고치지 않을 수 있게 무엇을 써야 저도 만족하고 보는 사람도 만족하는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이건 제 방식이고, 저의 흥미 포인트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여기서 내가 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어떤 순간을 맞이하게 하고 싶어요. 드라마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상대가 나에게 이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툭, 강렬하게 오는 순간들요. 그 순간 이전의 내 이야기들과 맞닿아서 ‘나한테 하는 얘기다’라고 느낄 때, 화학작용이 있어요. 저는 그게 가장 중요해요.
GQ 하고 싶은 이야기는 파도처럼 불현듯 밀려오나요, 아니면 물에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찾아오나요?
JH 여러 아이템이 쓱 하나로 모여서 한 지점에서 탁 만나는 날이 있어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려고 이런 생각을 쭉 했었구나 느껴지는 날. 그날 쓰는 거죠.
GQ 운명을 믿어요?
JH 믿어요. 우연보다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좋잖아요. 그 편이 더 성의 있어지고요. 저는 하루하루 성의 있게 살고 싶어요. 옷 입는 것도, 집에서도 매일 매일 성의 있게 사는 게 좋아요.

15화, 부정의 말.

GQ 요즘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나요?
JH 다미선 교회라고, 1992년에 종말론으로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 있어요. 사건은 천사를 직접 만났다는 세 명의 아이의 예언에서 시작돼요. 제 친구의 가족이 그 사건에 휘말려서 안 좋은 마지막을 맞기도 했죠. 저는 미움과 분노가 크게 없는 편인데 사람의 약한 면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분노해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병들거나 마음 약해진 사람들을 조종해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하죠. 그때 천사를 보았다고 증언한 세 명의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뭐 하고 있을까? 라는 물음들로 시작했어요. 무엇이 이성적인 사람을 비이성적인 데 매달리게 하는가,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에요. 우울하죠. 2부까지 썼어요. 그리고 시즌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돈에 관한 이야기예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왜 돈에 열광하는지 궁금해서 비즈니스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다 이 이야기를 쓰려고 그런 거였나 봐요.
GQ 거기에도 왠지 달콤한 고통이 담겨 있을 것 같네요. <인간실격>을 통해 ‘달콤한 고통’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JH 너무 솔직한 고백일 수도 있어요. 연애를 할 때도, 아주 기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사실은 고통스럽고 어떤 비릿한 마음이 존재하고, 그런 마음을 즐길 때 있지 않나요? 그런 비릿한 마음들이 자유롭게 즐기는 요소가 되길 원했어요. <인간실격>을 쓸 때 내가 비로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느꼈고요. 이상해요. 노래는 고통스럽고 비릿해도 즐기며 부르는데, 이야기에 오면 훨씬 더 보수적이게 되죠. 이 이야기를 참고 보다 보면,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즐겼던 순간이 여기에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15화, 부정의 말.

GQ <인간실격>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사람들이 여전히 ‘인모닝’으로 안부를 나누고 있더군요. 끝나지 않는 드라마가 거기 있는 것 같았어요.
JH 그걸 이루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드라마는 끝나지 않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들이 그걸 실천하고 계신 거예요.
GQ 썼다 지웠다 하는 말처럼, 어쩌면 그 무엇보다 진심의 언어로 그들에게 부치고 싶은 말이 있나요?
JH <인간실격>은 굉장히 많은 것을 열어줘야 들어오는 이야기예요. 열려고 노력하지만 열기 쉬운 마음은 아니죠. 출판사를 만들 때, 책을 내려고 100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때 공무원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수업에 앉아 있었어요. 수업 중 교수님이 한 일화를 이야기하셨어요. 청소하는 아주머니 앞에서 어떤 학생이 쓰레기를 버리고 갔나 봐요. 교수님이 멋쩍어서 “요즘 애들이 참 그렇죠?” 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아니요, 착한 애들도 많아요”라고 하셨대요. 그 말이 마음에 탁 와 닿아서 울었어요. 교수님이 제게 누구냐고 묻더라고요. 인터뷰하러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죠. 잠시 뒤에 지하 창고에서 술을 하나 가지고 오셨어요. 언젠가 이 술을 나누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따라고 선물 받은 귀한 술이었어요.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했고, 이 술이 오늘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아니요, 저는 교수님의 말씀이 감동적이라서 울었을 뿐이에요.”, “감동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감동받을 수 있다.” 교수님이 건넨 그 술을 마신 10년 전 그 순간을 정말 많이 생각해왔어요. 그리고 그날, 그 순간이 지금 매일 이어지는 것 같아요.

피처 에디터
전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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