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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472년의 기록, 더 알고 싶어지는 이야기

2026.04.02.김은희

실로, 실록.

세조실록
을해(1455) – 무자(1468) 1권, 총서 다섯 번째 기록

‘전세조존영도 傳世祖尊影圖’. 서울 신수동에 안치되었던 그림으로 복개당의 주신 격인 세조의 영정이 무신도로 모셔졌다. 가운데가 세조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앞서 태종 4년 1404년 양력 3월 18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상이 친히 궁시 弓矢를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았다. 그런데 말이 넘어졌기 때문에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관 史官이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이마저 남은 실록 實錄은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는 뜻으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여기 성실한 사관을 비롯해 많은 이가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나 진실성이 피비린내에 흐릿해진 기록이 있으니, 1455년부터 1468년까지의 이야기 <세조실록>이다. 정변을 일으켜 잡은 정권에서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은 대개 목숨을 잃기 마련이고 <세조실록>은 그 배경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실록 아닌 실록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세조의 검붉은 속내가 묻어난 일화가 있다. 즉위 전 활동부터 재위 기간을 요약하여 기록한 서문인 총서에 적힌 이 이야기다. 얼핏 읽으면 세종이 진평 대군(세조 나이 11세에 봉해진 이름)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효용과 위현이란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면 달리 읽힐 것이다. 효용 驍勇: 사납고 날쌔다. 위현 韋弦: 스스로 몸가짐을 중도에 맞도록 경계하고 자기 성질의 모순을 경계하는 것. 성질이 급한 자는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차고서 이를 보고 행동을 늦추고, 성질이 느린 자는 활 시위(弦)를 차고서 스스로 긴장시켜 그 행동을 빨리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세종이 세조의 사납고 날쌘 성질을 알고서는 그러니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성정을 고치라는 의미를 담아 한 말로 해석된다. 너른 이불보를 휘감았으면 그의 탐욕이 사라졌을까. <세조실록>의 시작이자 <단종실록>의 가장 마지막 기록, 단종 3년 1455년 윤 6월 10일, 양력 7월 24일에는 이 문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심하게 안개가 끼었다.”

연산 9년
계해(1503) 8월 23일(정사) 양력 1503년 9월 13일

e뮤지엄에서 “조선시대 재해/지진/ 벼락/태풍”을 검색하자 이 신발이 도출됐다. 통나무를 파서 만들어 비가 오는 날이나 땅이 진 곳에서 신던 굽 높은 나막신.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그의 이름은 무엇일까, 폭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연산군에게 조심하고 반성하시라 직언한 이는. 정원 政院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 직속의 비서 기관으로 승정원이라고도 불렸다. 충직한 일꾼의 이름이 궁금하다가도,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으나, 누가 주도자인지 알 수 없게 이름을 빙 둘러 적은 사발 통문마냥 “정원에서 아뢰기를”이라며 단체로 전하는 의견이 고귀하고도, 지진이 일었으니 행실을 반성하라 요하는 내용이 현대 과학 기준으로서는 왕이 다소 억울하리라 싶기도 하다. 하나 그 옛날에는 임금을 하늘과 사람 사이에 위치한 자로 여겨 가뭄이 일고 홍수가 터지고 낙뢰가 치고 땅이 울리면 정종의 기록처럼 왕은 “통렬히 스스로 책망”하곤 하였다. 지금에야 인간 존재가 우주의 작디작은 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자연 재해 앞에서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한가 되묻지만, 그럼에도 <연산군일기>에 남은 그의 평소 언행을 보면 이 기록이 남아 오래도록 전해지는 일이야말로 그가 하늘로 여기지 않았던 백성이 내린 길고 긴 형벌이지 않을까 싶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 전하께서 하늘의 위엄을 만홀히 여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면서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 가실 것입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서로 두려워하지 않으리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내가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을 들어줄 수 없다.’”(<연산군일기> 24권, 연산 3년 6월 5일), “왕이 풍류와 여색에 빠져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늘 태평한 세상이라고 스스로 과장해왔기 때문에, 천재와 시변을 듣기 싫어하기를 이같이 한 것이다.”(<연산군일기> 62권, 연산 12년 4월 11일)

태조 2년
계유(1393) 12월 5일(병자) 양력 1394년 1월 7일

조선시대에 금주령은 빈번했다. 가뭄이 들어 흉작일 때 곡식으로 빚는 술을 금한 것이다. 언제나 풍년일 수 없기에 곡식을 아껴야 하는 상황은 자주 생겼고, 국가와 백성들의 제사나 사신 접대용, 혼인식이나 노병자의 약용, 술을 팔아 생계를 잇는 서민들의 양조만이 암묵적으로 용인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특별히 금주령이 해제된 때가 있으니, “한창 혹한기”인 겨울철 일이다. 1300년대, 특히 추운 날 즐겨 마시던 술로는 소주가 있다. 지금의 소주와는 다르다. 현재 희석식 소주는 일제 강점기 이후 등장했다면 당시 30~40도 이상 고도주이던 소주는 고려, 그보다 앞서 몽골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집집마다 저마다의 손맛으로 술을 빚던 우리의 가양주 문화 속에서 특히 안동 소주가 어떻게 지역 특산주로 살아남았는지 안동청년기자연합이 2016년 <경북in뉴스>에 기획 연재한 기사 ‘소주 한 방울에 담겨진 실크컬처 로드’에 따르면, 고려 소주라고도 부르는 한국 소주의 탄생은 원(몽골)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1275년 전후다. 이 시기는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던 때와 맞물리는데, 몽골 전사들이 춥고 황량한 초원을 달리며 밤을 지새울 때 육포와 몽골식 독한 발효주인 아라크를 지니고 다닌 데서 소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라크는 말 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아이락을 솥에 넣고 끓여 증류하는 방식으로 만들고, 소주는 쌀로 빚은 청주를 증류해 만든다. 1614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 <지봉유설>에 저자이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은 적었다. “소주는 몽골에서 나왔는데 약으로나 쓸 뿐이지 함부로 마시면 감당하지 못해 세상 사람들은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 한다.” 그 작은 한 잔을 함부로 들이켤 때 타오르는 식도와 뜨끈해지는 배의 열기란.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고 말고.

태조 1년
임신(1392) 9월 30일(무신) 양력 1392년 10월 16일

‘소나무와 학’, 조선시대 필자 미상 군학서상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후 태조 3년 1394년에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면서 종묘는 현재 위치인 서울 종로구 종로157에 자리하게 됐다. 위치는 변했을지언정 선대 왕들을 모시는 터를 우선으로 살핀 것, 그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소나무를 베지 말라” 명한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태조 7년 1398년에는 경복궁 왼쪽 산등성이의 소나무가 말라 죽자 근처 인가를 옮기고, 태종 5년 1405년에는 송충이가 종묘 북쪽 산의 솔잎을 갉아먹자 사람들을 모아 잡게 했으며, 세종 4년 1422년에는 함부로 소나무를 베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강구하는 등 예부터 소나무는 귀하게 여겼다. 군용 배를 만들거나 제사 축판에 쓰이거나 궁궐 등 단아하고 튼튼하게 건축물을 지을 때 으뜸가는 목재인 것은 물론 풍치적 가치가 높아서다. 이에 극히 신선하게 보호해야 할 장소로 꼽히는 종묘 둘레에 심은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게 자리해서, 지금의 종묘는 뙤약볕에 들어서도 금세 땀이 식는 울창한 숲이 됐다. 침엽수보다 성장이 빠른 활엽수가 압도하는 자연 천이의 결과로 현재 종묘에는 1백여 그루의 소나무와 8백여 그루의 갈참나무, 이 외에도 밤나무, 은행나무, 물푸레나무 등 7천7백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도시의 소음이 묵음이 되는 종묘,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위해 마련한 고요한 공간에 들어서면 종묘의 가치를 전파하는 여러 지식인이 입 모아 남긴 말이 짙게 피어난다. “사람들은 숲이 종묘를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종묘가 그 숲을 지키고 있다.”

사진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 tory.go.kr, e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