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부모는 죽지 않는다

2011.04.25이충걸

E.L.
성인이 되어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내가 유약하다는 자의식이 사라질 것 같았다. 서른이 된 날, 세상은 폭발하지 않았다.극적인 전환점도 없었고, 자주적인 시간도 시작되지 않았다. 누군가 혹은 뭔가에 감찰 당하는 일은 더 심화되었다. 특히 부모로부터…성경에도 나온다. 마리아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예수를 지켜보는 장면. 그 성경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그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가슴에 새겼다.”

자식이 얼마나 나이 들고 돈을 벌고 성공했느냐에 상관없이,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다섯 살 아들이 장난감 가게에서 떼를 쓸 때부터 “일찍 들어와라”, “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부모는 판에 박힌 문구만 읽는 텔레마케터처럼 군림한다. 자식이 스물다섯 살이 되면 부모는 더 교묘해지다가 쉰 살이 되면 완전히 카다피가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힘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부모는 지나치게 많은 사랑을, 다른 부모는 지나치게 적은 사랑을 베푼다. 어떤 부모는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 돈을 쓰고, 다른 구식 부모는 순전히 죄의식에 의존한다.

가장 위대한 부모의 힘은 쉴 틈 없이 자식에게 돌아가려는 굽힐 수 없는 능력에 있다. 어쩌면 그들은 늙고, 심약하고, 자주 못 볼지 모른다. 이미 세상을 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졌건 반밖에 안 남았건 부모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 따라 약화되긴 해도 가장 확실하고 평범한 사실이다. 원할 때까지 깨어 있을 수 있고, 며칠씩 같은 속옷을 입어도 되는 나이가 됐다 해도, 성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다 익혀 더 배울 게 뭐 있을까 싶고, 드디어 통합된 삶을 그릴 수 있게 됐다 해도 부모의 힘은 살아 있다. 설사,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해서 부모가 죽기를 기다려봤자 이젠 난감해졌다. 고통스러운 링거와 패드와 스캔과 휠체어로 수축된 삶이라고 해도 예전보다 훨씬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에… 부모가, 공식적으로 노인으로 표명된 시민으로서의 일흔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다. 분수 모르는 부모는, 몸 상태 나쁜 날은 제 나이로 느끼지만 기분 좋은 날은 스물둘로 느끼니까.

물론 80센티미터도 안 되고, 완벽한 문장으로 얘기할 수 없는 자식에게도 반발력은 있다. 뒤뚱거리는 아기조차 부모의 호환성을 테스트하는 독특한 방법이 되고, 섹스 라이프를 붕괴시키며, 두드러지도록 효과적인 피임 도구가 된다. 신참 엄마의 리비도는, 완전히 사라진다기보단, 부적합하게 바뀐다. 심지어 부모를 전통적인 성 역할로 돌려놓기까지 한다. 좋든 싫든 남편은 아내처럼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없으며, 일이 없는 엄마가 종일 집에 있으면서 파출부 들이는 것을 정당화하긴 힘들다. 마침내 부모끼리 저 상대와 결혼한 게 잘한 일일까, 자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의 일방적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는 한 번밖에 없다. 부모는 보통 자식에게 조언해왔지만 기술은 평형상태를 역으로 바꿔놓았다. 부모에게 현대의 최신 메커니즘을 가르쳐주는 것은 자식이기 때문이다.(아들이 완전히 피곤한 세 시간을 비인간적인 인내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절대로 인터넷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분법적인 세상에 부모는 두 종류밖에 없다. 자기 삶이 자식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 부모’와, 아이보다 자기 코가 석 자인 ‘서양 부모’. 어쨌든 부모가 되는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조절할 수 있건 없건 잘되건 못되건, 부모 노릇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확실한지 안다. 게다가 부모도 잘못을 저지르고, 시도 때도 없이 못나 보인다. 자식이 이룬 모든 성과를 하나같이 우연이나 행운으로 받아들이는 무심함, 자식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담담한 재능, 제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사람도 모두 걔를 좋아할 거라는 착각, 거짓된 기쁨과 과장된 자긍심과 무조건적인 칭찬. 결국 부모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길을 비켜준다고 한들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불평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다 큰 어른이 어렸을 때 부모가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다루는지, 왜 그렇게 자기를 어린애처럼 느끼게 하는지 불평하는 것만큼 추한 꼴도 없다. 결국 부모와 연을 끊는다는 건 판타지다. 긴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열네 살 때 참을 수 없었던 부모의 모든 것이, 마흔 살이 된 후엔 존중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변할지도 모르고…

마침내 위풍당당 수십 년의 항해를 마치고 부두에 선 수백 만의 노인 부모를 보며 어떤 자식은 분노하고, 다른 자식은 연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겐 어떤 의무가 남았을 것이다. 노인으로서 쇠퇴해가는 광경을 자식에게 짐 지워선 안 되며, 당신이 자식에게 죽음의 경고가 되길 원치 않는다는. 그리고 자식은 종말의 순간에조차 부모의 훈장이라는.

(아까, 마리아와 예수 이야기에서 빠진 게 있다면, 마리아가 집에 돌아가 이웃에게 아이 자랑을 하는 것이다. “우리 애가 글쎄, 흙을 가지고 빵을 만든 거 있지. 끝내줘. 좀 전엔 학자들 앞에서 죄 사함에 대해 설명하더라니까. 근데 난 빵 만든 게 더 특별해 보여. 얘가 아예 그쪽으로 나갔음 좋겠어.” 마리아도 자식 자랑을 못 참는데 보통 부모들이야…)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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