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MEN OF THE YEAR #박찬욱

영화 <아가씨>가 어쩜 그렇게 시원하고 황홀했는지 알았다.

박찬욱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내한공연에 가는 길이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먼저 장갑을 벗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기보다 상대방의 손이 놓일 공간을 만들어주는 악수였다. 포옹이 아닌 목례였다. 장갑을 끼고 있는 박찬욱을 찍고 싶었다. 그의 영화 <아가씨>의 코우즈키는 호화롭고 끔찍한 책 애호가로, 항상 장갑을 끼고 책을 만진다. 장갑을 준비해오긴 했지만 이왕이면 박찬욱이 평소에 끼는 장갑이었으면 했다. 장갑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시장에 가면 당장 살 수 있는, 하얀 눈 결정이 수놓인 군청색 털장갑이었다.

그에게 이전 작품은 다음 작품을 결정하는 동력이었다. 이를테면 (<올드보이>의) 미도, 즉 “여성만이 진실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찜찜함”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졌다. <박쥐>가 한국 관객에게 그리 좋지 않은 반응을 얻자 “한국 관객에게도 공감을 얻을 만한 작품”을 구상했다. 올해 한국의 관객들은 <아가씨>를 알아봤다. <아가씨>는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보름 후 개봉했다. “1천만 관객이 쉽게 나오는 풍토에서 5백만에도 못 미친 영화지만, 저는 준수했다고 평가해요.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로는 흥행 10위였죠. 무엇보다 몇천 명의 팬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가 생겨났고요.” 연예인 관련 커뮤니티가 주를 이루는 <디시인사이드>에, 드물게도 한 작품에 대한 갤러리가 열렸다. ‘<아가씨> 갤러리’에서 그는 ‘감독님’도 ‘거장’도 아닌 ‘배운 변태’다. 퍽 얄궂은 별명이지만 그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한국 관객들이라면 그리 부적당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평가를 내리기보다 기꺼워했다. “젊은 관객들이 저를 친구로 봐준다는 게 정말 반가웠죠.” 박찬욱은 <아가씨>의 확장판에서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준비했다. “히데코에게 따귀를 맞은 숙희가 벽장 속에서 훌쩍이는 장면이에요. 그 조명 조건에서는 어두운 게 맞는데, 많은 팬이 그때 숙희의 표정을 보고 싶어 했어요. 맞지 않지만 조금 밝혔죠.”

여성은커녕 페미니즘을 공론화하려는 여성운동에 대한 인식조차 지금껏 암흑 속에 있었다. 올해 <아가씨>는 그 여성들의 얼굴을 환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박찬욱은 이전에도 남자들의 절박하게 한심한 면모를 곧잘 드러내왔지만 <아가씨>에서는 좀 더 가차 없었다. 예컨대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백작의 대사. 오히려 함께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보다 박찬욱이 페미니즘적인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것이 대담(<문학동네> 2016 가을호)을 통해 밝혀졌지만, 그것이 “제가 더 페미니스트라는 뜻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정서경 작가가 더 예술가였던 거죠. 그녀가 “아니, 여자라서 다 옳은 거 아니잖아요”라고 했다면, 저는 ‘페미니스트가 이런 장면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고 의식했어요. 저는 남자를 잘 아니까 더 과감하게 묘사했지만, 그녀는 남자 주인공에게도 일말의 매력을 남겨두고 싶어 했죠.”

한국 사람이라면 예술가 박찬욱에 대해 다만 몇 마디라도 보탤 수 있다. 영화광이라는 배경, 신체에 관한 잔인한 묘사, 화려하고 정교한 의상과 세트, 거의 빠지지 않는 노출 신, 은유적이고 문어적인 대사 등등.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박찬욱스러운 것’이 예술 영화라고 어렴풋이 인식했다. 하지만 스트리밍으로 ‘스킵’해가면서 영화를 보고, <넷플릭스>의 드라마를 더 흥미롭게 여기며, 영화 비평이 식사 시간의 화제로 오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고 영화를 예술로 보는 시각 자체가 어색해졌다. 오늘날의 영화 관객은 인류의 지적 능력 하락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저는 모르겠어요. 얼마 전 대구의 한 여고생이 집회에서 연설하는 거 보셨어요? 아가씨 갤러리에서 팬들이 만들어내는 짤은 보셨죠? 결코 하락했다고 보지 않아요. 취향이 바뀌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창작자와 소비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죠. 창작자가 나쁜 걸 공급한 건 아닐까요?”

<아가씨>에 등장하는 코우즈키의 이 대사에서 민족적인 관점을 제거한 게 박찬욱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그저 잔인한 법인데,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해서 글렀소.” 박찬욱의 주제는 아름다운 것과 윤리적인 것의 갈등이고, 그에게도 코우즈키의 애호가적인 결벽증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친일파의 미학을 설명하려고 만든 대사예요. 저 역시 정확성을 추구하죠. 기계 도면 설계할 때의 정확성과는 다른 것으로, 그 용도가 불분명하고 그 모양이 아무리 이상해도 흐리멍덩한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미학은 그런 게 아니에요. 한국이 무르고 흐리고 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무르고 흐리고 둔한 것에도 아름다운 점이 있죠. 흔히 금자씨의 ”뭐든지 예뻐야 돼”라는 대사를 마치 제 생각처럼 말하던데,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은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윤리예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윤리냐고 재차 물었다. “물론이에요. 제게 윤리는 심각한 질문이에요. 관객은 왠만해서는 윤리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아요. 그래서 강하게 하죠. 폭력, 섹스도 나오고 자극적인 형태를 띠어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일 바에는 모든 것이 정확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요,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을 쓰고,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하는 모든 것이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얼마나 강력하게 제기하느냐에 수반되는 우주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막연히 박찬욱이 코우즈키처럼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낄 거라고 예상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디지털이랑 필름 중 어느 쪽 사진이 채택됐는지 알려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왔을 때, 그가 무슨 감별을 해내려는 줄 알았다. 박찬욱의 답장은 “뭐가 선택됐는지 궁금해서요.” 이어서 한 통이 더 왔다. “굳나잇.” 그는 이 문자를 폴더폰으로 입력했을 것이다. 폴더폰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터치폰은 자꾸 오타가 나서 싫더라고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다뤄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맨손으로 정확하게 입력해야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이고, 윤리라고 바꿔 말해도 무방했다. 정전식 터치를 지원하는 털장갑이 있다는 건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