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마티 클라바인의 빛과 그림자

2020.03.23GQ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화가. 마티 클라바인의 이름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Artist And Model, 1959

Abraxas by Santana, 1970

Bitches Brew by Miles Davis, 1970

Annunciation, 1961

Crucifixion, 1963~1965

Julie Awake, 1974

마티 클라바인을 언급한 기록들 중 하나를 무작위 추첨을 하듯 뽑는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내용이든 하나쯤 익숙하고 굵직한 이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리처드 기어, 마이클 더글러스, 지미 핸드릭스, 에른스트 푸크스, 존 F. 케네디, 브리지트 바르도,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대체 클라바인이 누구길래 당대의 인물들과 나란히 하는 걸까? 앤디 워홀은 그를 두고 이렇게 칭했다. “마티 클라바인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화가다.”

워홀의 말처럼 클라바인은 길고 긴 무명 세월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순수 예술 작가의 경력을 좇지 않았다. 그 대신 앨범 커버 작업에 깊이 천착했다. 클라바인은 1970~1980년대에 걸쳐 명반으로 회자되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산타나의 앨범을 비롯해 50점 이상의 획기적인 커버 아트 워크를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줄곧 유령처럼 여겨졌다. 음악성과 예술성을 논할 때마다 손에 꼽히는 앨범 커버의 창작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때 사이키델릭 아트의 인기에 힘입어 클라바인의 작품이 다시 조명을 받긴 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실제로 클라바인이란 이름이 제대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그의 경력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저명한 갤러리들이 클라바인의 작품을 다루며 재평가에 나선 것이다. 그가 2002년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었다.

소용돌이 치듯 미술계가 뒤늦게 클라바인을 소환한 건 그의 고유한 스타일 때문이다. 작품적 특징을 보면 화려한 색상과 몽환적인 이미지, 신성함과 불경한 요소가 조화롭게 융합되어 있다. 특히 다문화주의적 의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작품이 완성된 반세기 전보다 21세기의 시대상에 더 어울린다. 힙합 장르의 시초라 여겨지는 라스트 포에츠, 마일스 데이비스, 산타나, 지미 헨드릭스,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의 앨범 커버에는 극사실주의적 표현과 아프리카 중심적 관점이 짙게 배어 있다. 그 당시 평화를 외치고 진보를 갈망한 히피들의 목소리보다 더 큰 다양성과 포용성을 드러낸 셈이다.

클라바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유랑으로 점철됐다. 그는 1932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우하우스 운동에 일조했던 폴란드-유대인 건축가였으며,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였다. 클라바인이 태어나고 2년 뒤, 클라바인의 가족은 나치를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가 열여섯 살이 됐을 때 부모님은 별거를 선택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줄리앙 아카데미에 진학했고 훗날 20세기 미술사에 튜비즘을 창안한 페르낭 레제를 만났다. 이후에도 클라바인의 유랑 생활은 이어졌다. 리비에라와 뉴욕을 거쳤고, 파리에서 만난 보헤미안들과 카페와 갤러리를 전전하기도 했다. 긴 방황 끝에 클라바인은 마요르카에 정착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나는 이 세 가지 문화권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 같은 성장 배경은 내가 아웃사이더 기질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잠시 영화인이 되길 꿈꾸기도 했던 클라바인은 환상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에른스트 푸크스의 도움으로 다시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푸크스는 클라바인에게 템페라 회화 형식을 참고해 유화 기법을 좀 더 다듬으라 조언했다. 이는 그의 작업 방식에서 큰 틀이 된다. 뉴욕에 정착한 클라바인은 1964년 ‘크루서픽션 Crucifixion’이라는 작품을 공개해 소란을 일으켰다. 기독교 미술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책형을 특유의 관점으로 재해석했는데,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신성 모독 논란을 빚었다. 심지어 한 관람객은 격분한 나머지 도끼를 들고 클라바인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의 진가가 빛을 발한 건 1970년 초반이었다. 클라바인은 음악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업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그 당시 앨범 커버 이미지는 대량 상품의 하나로, 감상이나 평가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앨범 커버가 아티스트의 이미지 구축과 마케팅 전략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오래전 발매된 앨범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이를테면 비틀스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 오아시스의 2집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커버는 발매 당시 난해하고 아이러니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 클라바인이 작업한 앨범도 마찬가지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의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클라바인의 장남인 발타자르는 열정적인 영화 제작자이자 아버지의 유산에 깊은 애정을 지닌 관리인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클라바인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음악이다. 발타자르는 “아버지 곁에는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 아침에는 알람 대신 음악 소리에 눈을 떴다”라고 말했다. “장르를 가리지도 않았다. 아프리카 음악, 플라멩코, 클래식, 아프로큐반, 재즈, 때로는 랩이나 힙합, 드럼 베이스를 듣곤 했다. 작업실은 작은 음반 가게를 들여놓은 것 같았다. 놀랍게도 세계 각지에서 아버지한테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왔고, 그 음악들이 쉼 없이 재생됐다.” 발타자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못 말리는 방랑가 기질을 떠올리기도 했다. “여행을 정말 많이 하셨다.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균질화된 세계를 싫어했다.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이를 흡수해 작품에 투영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변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음악을 거침없이 흡수했던 클라바인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도 추측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살바도르 달리보다 훨씬 앞서 미술사에 기괴하고 초현실주적 그림들을 남겼다. 클라바인은 살바도르 달리와도 가깝게 지냈다. 발타자르가 두 사람 간의 잊지 못할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달리의 초대로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문이 열려 있어 아무렇지 않게 작업실로 들어갔더니 달리가 이젤 뒤에 앉아 여자 모델 앞에서 자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모델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클라바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문화를 흡수한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콜라주였다. 10대 소년이 자신의 스크랩북을 채우듯 그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취합하고 섞었다. 그것들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시시하고 진부해 보일 수 있지만 클라바인의 작품에선 하나의 강렬한 세계를 이뤄 아우라를 뿜어낸다. 발타자르는 “글 같은 그림이랄까, 아버지는 결코 개념론자는 아니었지만 작품에는 어떤 개념이 늘 존재했다. 대부분 보편적이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주제였다”라고 말했다. 클라바인이 1963년부터 2년간 매달려 완성한 거대한 원형 작품 ‘한 알의 모래 Grain of Sand’를 예로 들 수 있다. 한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미지가 빼곡하게 채워진 그림에는 레이 찰스, 피카, 롤랜드 커크, 브리지트 바르도, 마릴린 먼로, 소크라테스, 외계인 등이 카메오처럼 등장한다. 이 작품을 두고 클라바인은 “위아래가 정해지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도 벽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공전하는 우주를 구현했다”고 말했다. 또 이렇게 덧붙였다. “작업을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반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나도 마릴린 먼로에게 빠져 있었다.” 클라바인은 공상과학 소설 ‘문스케이프 Moonscapes’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즐겨 차용하기도 했다. 이는 1970년에 발표된 두 장의 명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음악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산타나의 <Abraxas>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Bitches Brew> 앨범이다.

클라바인은 음악인들의 록 스타였다. 그가 작업을 한 앨범 커버는 음악 신에서 큰 반향을 이끌었다. 특히 마일스 데이비스가 클라바인의 든든한 조력자였다면, 지미 핸드릭스는 열정적인 팬이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클라바인의 작품은 ‘Aleph Sanctuary’라 불리는 설치 작업이었다. 운반이 가능하며, 3미터 높이의 벽으로 구성된 정육면체 형태의 작은 사원인데 성서 구절을 인용한 68점의 그림이 사방에서 신비감을 자아냈다. 뉴욕 유니언 스퀘어에 위치한 클라바인의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이 완성됐을 때 핸드릭스는 그 안에서 LSD에 취한 채 자신을 둘러싼 그림들을 흡수하듯 감상했다.

한편 화려한 색감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강렬하게 뿜는 클라바인의 작품은 그가 창작 활동을 위해 마약에 기대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낳기도 했다. 이에 대해 클라바인이 공식적인 답을 하진 않았지만 발타자르는 억측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가 약에 취해 작업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말년에 LSD에 손을 대긴 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그 이전에 완성됐다. 아버지한테 LSD를 소개한 티모시 리어리 또한 아버지는 초현실적인 비주얼을 만들기 위해 환각 상태에 도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티모시 리어리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 출신으로 LSD의 효능에 매료돼 이를 대중화시켰고, 히피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가 된 문제적 인물이다.

1980년대에 이르자 클라바인은 마지막인 것처럼 창작의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전의 방종한 습관과 유희에서 벗어나 작업에만 몰두했다. 매일 여덟, 아홉 시간씩 그림을 그렸으며 약간의 음식과 다량의 카페인만을 필요로 했다. 이 무렵 클라바인은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주로 제작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 노엘 코워드, 줄리엣 비노쉬, 리처드 기어, 마이클 더글러스가 그의 고객이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남편의 피살 후 재클린 케네디가 의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프랑스의 사진가 베니타 랭스 초상화를 완성한 뒤에는 그림값으로 흰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받았다고 한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클라바인의 수많은 유산 가운데 제일 강렬하고 유명한 작품을 꼽자면 역시 산타나의 <Abraxas> 앨범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Bitches Brew> 앨범 커버에 쓰인 그림일 것이다. 그의 이름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반면 그의 아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따로 있다. 발타자르는 아버지가 노년에 남긴 재활용 작품에 더 애정을 느낀다. 클라바인은 낡고 버려진 그림들을 구입해서 그 위에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발타자르는 이를 ‘진화한 그림’이라고 일컬었다. 클라바인의 대다수 작품은 콜라주와 몽타주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초현실적인 병치와 유희적 감각으로 가득하다. 마지막 시기, 그는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작업에 이런 식으로 방점을 찍은 것이다. 클라바인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꿈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섹스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고, 언젠가는 마약을 꿈꾸기도 했다. 이제 곧 나는 빛을 꿈꾸게 될 거야.”

    에디터
    Dylan Jones
    사진
    © Klarwein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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