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T의 아버지들

2010.10.08GQ

25년 전 출간된 <해커>라는 책은 세상과 담을 쌓은 컴퓨터 괴짜들이 디지털 세계를 개척한 역사를 기록하고있다. <해커>의 저자가 빌게이츠, 스티브 워즈니악과 같은 컴퓨터 산업계의 거물들과 재회했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팔걸이 의자에 기대어 말했다. “생각해보면 웃기죠. 내가 어릴 적에는 주변에 나이 많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우리가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을 일으킬 때만 해도, 이 바닥에 나이 많은 사람은 없었어요. 이 산업이 이렇게 오래된 걸 보니 정말 묘한 기분이 드네요. ”쉰줄에 들어선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빌 게이츠와 나는 25년 전 인터뷰를 이어가는 중이다. 당시 빌 게이츠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나는 급증하던 컴퓨터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포착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고 터무니없이 똑똑한 데다가 멈출 줄 모르는 창조력을 지닌 ‘해커’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빌 게이츠는 IBM에 DOS 운영체제를 공급하는 계약을 막 성사시켰다.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이후 빌 게이츠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지만, 첫 만남은 좀 특별했다. 그가 보여준 컴퓨터에 대한 열정에서 난 역사적인 의미를 찾았고, 빌 게이츠는 존경에 찬 내 눈빛을 일종의 호기심으로 간주했다. 나는 그때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어떤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쓴 <해커 : 컴퓨터 혁명의 영웅>은 1984년 말에 출간됐다. 편집자가 큰 시야를 가져보라고 부추긴 덕에 일을 크게 벌였다. 컴퓨터 코드의 한계 속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발견한 뛰어난 프로그래머인 해커들이 어떻게 디지털 혁명을 주도하는지를 기록했다. 애초부터 결론에 도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 기획했을 때, 해커라는 사람들을 그저 재미있는 하위문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를 계속하면서 해커는 불가능하다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MIT의 해커 1세대들은 컴퓨터로 오늘날 워드 프로세싱이라 부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초기 프로그램의 명칭은 ‘비싼 타자기’였다. 이를 구동하는 기기의 가격인 12만 달러에 딱 맞는 별명이었다.) 이 어디지털 비디오게임도 발명했다. 또 실리콘밸리의 홈브루 컴퓨터클럽에 소속된 반항적 엔지니어들은 처음으로저가 칩을 이용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다. 그들 모두는 처음엔 변두리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커들은 무어의 법칙을 구성하는 구체적 수치를 마술적으로 변화시켜, 세상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일련의 거침없는 진보를 만들어냈다. 정작 해커들은 그걸 몰랐다. 그저 놀라운 걸 만드는 재미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러한 창조력 뒤에는 더 놀라운 것이 숨어 있다. 나는 책에서 해커들의 행동양식을 정리해 ‘해커의 윤리’라는 일련의 원칙으로 성문화하려고 했다. 몇몇 항목은 지금 보기에는 이마를 탁 칠 정도로 명료하지만,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컴퓨터에서 예술과 미를 창조할 수 있다.”, “해커는 학위, 연령, 인종, 지위같은 기준이 아닌 해킹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컴퓨터는 반란의 도구다.”, “기존권력을 부정하고 권력의 분산을 촉진하라.” 그러나 해커 문화에 대해 내가 가장 핵심적으로 추구했던 규칙은 가장 큰 논란을 낳았다. “모든 정보는 대가가 없어야 한다.” 해커의 대부인 스투어트 브랜드는 나의 이 문구를 해킹했다. 그일은 <해커>가 출간된 주에 열린 최초의 해커 컨퍼런스에서 내가 사회를 맡은 ‘해커 윤리의 미래’에 관한 순서에서 일어났다. 브랜드가 말했다. “정보 자체는 매우 가치가 높기 때문에 비쌉니다. 한편으로 정보를 얻는 비용은 갈수록 낮아집니다. 이 두 측면이 서로 싸우고 있는 거죠.” 이는 해커 운동을 만들어온 긴장을 축약한 말이기도 했다. 이상주의와 차가운 상업주의 사이의 열띤 다툼 말이다.

<해커>는 출간과 함께 약간의 비난을 받았지만(<뉴욕타임스>는 “엄청나게 과장된 잡지 기사”라 평했다.) 결국 내 기대보다 훨씬 더 큰 반응이 이어졌다. 우연히 이메일, 트위터 등을 통해 아직도 <해커>가 자신의 진로에 영감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 구글의 최고 정보 담당자인 벤 프리드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그는 내게 모서리가 닳아빠진 <해커>를 보여주며 사인을 부탁했다.“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 이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해커들이다. 컴퓨터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해커의 혜택을 받았다. 지금은 의미가 좀 바뀌긴 했지만 해커라는 단어도 이제는 잘 알려진 용어가 됐다. 80년대 중반이 되자 개인용 컴퓨터로 무장한 10대들이 몰려 나왔는데, 이때부터 해커라는 단어는 컴퓨터를 창조의 도구가 아니라 도둑질이나 감시용으로 쓰는 사람을 지칭했다. 진짜 해커들은 두려움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책에서 다룬 해커는 도둑질이나 파괴가 아닌 배움과 창조의 욕구가 무한한 사람들이다. 이런 해커 부류는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 잭 바우어를 곤경에서 구해주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꼬맹이 전문가나, 티셔츠를 걸친 천재 백만장자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해커>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상업주의의 위협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처럼 오히려 해커가 상업주의의 본질을 바꿔놓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해커>의 개정판(오라일리 미디어에서 올해 봄부터 첫 디지털 버전을 포함한 개정판을 내놓았다)을 통해 인물과 해커 문화에 대한 논의를 전부 다시 시작했다.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지난 25년 동안 벌어진 기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빌 게이츠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부와 명예,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배타적인 하위문화를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번창시켰다. 다른 이들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적응 자체를 원치 않았거나, 그저 운이 없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그룹도 있다. 이들은 상업주의와 해킹이 대립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랐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새로운 영역으로 옮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해커 운동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빌 게이츠가 말했다. “난 10대와 20대 시절의 강렬함을 믿습니다. 20대에 난 그저 일만 했습니다.” 물론 돌이켜보면 빌 게이츠는 자신의 해커 시절의 절정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고 말한다.“제일 광적이었던 시절은 13세에서 16세까지예요.” “그럼 하버드에 입학할 때는 하산할 시점이었나요?” “하루에 24시간 프로그래밍을 하는 뜻에서는요? 물론이죠. 확실히 17세 때 나의 소프트웨어 사상이 완성되었죠.”

27세의 그와 만났을 때처럼 빌 게이츠는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그 강렬함이 빌 게이츠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룡으로, 그 자신을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바꾸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해킹에 대한 게이츠의 신조는 그의 모든 일에서 강조되며 채용 결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싶다면 그 친구의 코드를 살펴봅니다. 그게 전부죠. 그가 코드를 많이 만들어보지 않았다면 고용하지 마세요.” 빌 게이츠는 해킹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상 최고의 코드 작성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만든 베이직의 최초 버전은 경이로운 물건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성되었는지 알테어의 4KB짜리 메모리에서도 돌아갔다. (메가나 기가, 테라가 아니라 4킬로바이트였다.) 사람들이 컴퓨터 괴짜를 생각할 때, 대개 어린 빌 게이츠 같은 모습을 떠올린다.

빌 게이츠가 그저 다른 해커와 같았다면 돈, 영향력, 명성을 얻진 않았을 것이다. 순수한 해커는 누구나 자신이 만든 코드를 복제하고 뜯어보고 개선하게 놔두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가 다른 지적 재산과 전혀 다르지 않으며 프로그램을 복사하는 것은 마트에서 셔츠를 훔치는 것과 똑같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1976년, 그는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복제한 컴퓨터 호사가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이들을 도둑이라고 비난했다. 일부 해커들은 그의 공격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빌 게이츠가 지식과 창조를 억누르는 상업적 제약으로 자신들의 취미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다. 빌 게이츠는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난 정말, 사람들이 소프트웨어에 돈을 지불한다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문제를 제기했던 거라고요.” 30년도 더 지나 그가 한 말이다. 갈등은 계속되었다. 빌 게이츠는 수세기 전에 유럽의 출판업자들이 미국인 저자의 작품을 아무런 보상 없이 출간한 사실을 지적하며 말했다. “벤자민 프랭클린도 도둑을 맞은거죠. 그도 나와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을 겁니다.”

“빌 게이츠는 주류로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해커의 윤리 규정을 어겨야만 했다. 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악은 댄스화를 신었다. 그는 원조 애플 컴퓨터의 설계자로 잘 알려진 해커의 전설이다. 작년, 워즈니악은 <스타와 춤을Dancing with the Stars> 예능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내며 누구도 예상치못한 팝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스타와 춤을>에서 봤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었죠. ‘어, 근데 전 컴퓨터도 만들었답니다.’” 평범한 팬들이 워즈의 업적을 몰라보는 건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대중은 워즈가 가십 잡지에 등장하고 애플 스토어 앞에서 신제품 발매 첫날 줄서 있는 모습을 두고 서글픈 무관심의 징후라며 가차 없이 조롱했다. 하지만 워즈는 이러한 조롱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몇년 전에 그리핀에게 해준 말을 내게 들려줬다. “나를 맘대로 비난해도 좋고 욕해도 좋고 비웃어도 좋아요. 그걸로 사람들이 웃는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니까.” 난 <해커>에서 워즈를 사회성이 부족하고 불안한 백만장자로 묘사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사랑 받는 마스코트가 되었다.

가끔 워즈는 놀라운 기술을 가진 신생 기업의 실세로 뉴스에 등장하기도한다. ‘CL9’라는회사를 세워 초강력 리모컨을 만들 계획이었고, ‘Woz(Wheels of Zeus)’는 무선기술로 사용자가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첫 번째 회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두 번째 회사는 제품조차 내놓지 못했다. 현재 그는 스토리지 회사인‘퓨전-io’에서 수석 과학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판매, 홍보업무에 주력하고 있죠. 하지만 미래에 경쟁력을 가질 만한 기술을 찾고 있기도 합니다.”

워즈의 제자 중 하나인 앤디 허츠펠드는 여전히 해킹을 하면서 감동을 받는다. 허츠펠드는 <해커>의 주요 인물은 아니었지만 애플의 초창기 직원이자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구글에서 일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그의 업적은 구글 뉴스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기술을 만든 것이다. 덕분에 이용자는 사건이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50대의 해킹은 20대 시절의 해킹만큼 쉽지 않았다. “맥을 가지고 해킹할 때는 한 시간이 지났겠거니하고 시계를 보면 네 시간이 지난 상태였죠. 그런데 이젠 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정말 한 시간이더군요.”

허츠펠드의 경험을 바꿔버린 것은 세월의 흐름만이 아니다. 그는 컴퓨터광과 산업이 공존하는 복합체에 적응해야 했다. 어찌 보면 구글은 해커의 메카다. 구글은 엔지니어를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보기 때문이다. 분명 이는 해커 친화적인 가치다. 게다가 구글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지지한다. 하지만 허츠펠트는 구글이 제품을 만들 때 딱딱한 기준과 프로세스를 적용하는 대기업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구글에서의 생활은 보다 규칙적이고 재미도 덜하다. “나와 일의 관계는 아티스트와 작품의 관계와 같습니다. 구글에서는 즐기면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그게 나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인데 말이죠.”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통제력을 조금 잃은 대신 세상에 족적을 남길 만한 권력을 얻었다. 구글 직원은 누구든지 코드 몇 줄로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애플의 초창기 시절, 즉 모든 잠재성이 아직 터지지 않고 제한도 없던 시절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다.“큰 충격을 줄만한 수단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류죠. 구글, 그리고 아이폰은 60년대의 비틀스보다 문화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인간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 거죠.”

이상주의자
리처드 그린블러트는 인터뷰를 시작하며 내게 불평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MIT의 MAC 프로젝트(MITAI연구소의 전신)의 고전적인 해커였다. 나는 그의 위생관념에 질겁한 MIT 동료 해커들이 후각적 불쾌감을 측정하기 위해 ‘밀리블러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사건을 <해커>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것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내게 불만을 털어놓으려는 것일까? 다행히 리처드 그린블러트는 더 큰 이슈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그는 HTML이나 C++ 같은 코드 언어들이 널리 사용되는 세태를 증오했다. 그는 예전에 MIT에서 연구할때 아끼던 언어인 LISP를 그리워했다. “더러운 세상이에요.” 그가 프로그래밍 환경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 물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코딩 문제는 시작일 뿐이다. 리처드 그린블러트의 말에 따르면, 진짜 문제는 개방과 창조라는 문화를 침범한 기업의 이해관계다. 리처드 그린블러트가 잘나가던 시절, 그와 동료들은 자유롭게 코드를 공유했다. 이들은 순전히 더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위해 헌신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버튼을 많이 눌러서 광고를 많이 보도록 웹페이지를 포맷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불편을 느끼게 뭔가를 만드는 이들이 성공하더군요.” 그린블러트는 빌 게이츠나 앤디 허츠펠드와는 다른 부류다. 해커의 열정을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바꾸는 세상의 큰 흐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발견의 기쁨의 가치를 고수하는 진정한 신도다. 이들은 중요하고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엄청나게 팔린 제품을 내놓지도, 상징이 되지도 못했다. 그저 해킹을 고수할 뿐이다.

제25회 해커 컨퍼런스에는 이와 유사한 이상주의자들이 모여있었다. 경제 이론부터 데이터 저장까지 모든 것이 논의됐다. 30세 이하의 참석자를 좀 더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모인 사람들의 연령은 조금 높은 편이었다. 기술 산업에는 젊은 천재들이 가득할지 모르겠지만, 늙은이들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 대부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묻히겠지만 말이다. 리처드 그린블러트는 이 모임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해커 문화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MIT 시절로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다. 그가 MIT에 입학했을 때, 마침 모형기차 클럽 회원들은 귀중한 대화형 컴퓨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린블러트는 회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코드 작성자가 되었다. 그가 이뤄낸 성과에는 정교한 LISP 컴파일러와 최초의 컴퓨터 자동 체스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MIT에서 그는 해커 중의 해커로 알려졌다.

그러나 빌 게이츠, 스티브 워즈니악, 허츠펠드와 달리 그린블러트의 작업은 주류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그는 LISP 기계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사업가형 인간이 아니었다. 요즘 그는 자신을 독립적 연구자로 칭한다. “내가 15년동안 연구한 주요 프로젝트는 영어 해석기에 관한 것이에요.” 그는 말한다. “이건 기초 연구 분야죠. 요즘 먹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중요한 겁니다.” 그린블러트는 요즘 해킹 환경이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해킹이란 말 자체도 의미를 상실했다고 봤다. “그 친구들이 우리이름을 훔쳐갔죠. 그리고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고요.”

과거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그린 블러트뿐만이 아니다. MIT의 인공지능연구소 사람인 리처드 스톨먼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스톨먼은 해커 문화의 쇠퇴를 한탄하고 있었고, 소프트웨어의 상품화를 범죄라고 생각했다. 그를 만난 그해에 컴퓨터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프트웨어가 소유의 대상이 된다는걸 믿을 수가 없네요.” 나는 그를 “최후의 진정한 해커”라고 불렀고, 세상이 곧 그를 으깨버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무료 소프트웨어를 향한 스톨먼의 여정은 지적 재산에 대한 계속된 투쟁을 꾸준히 이끌었고 매카써 재단으로부터 ‘천재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무료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고 GNU 운영체제를 작성했다. GNU와 리눅스의 조합은 수백만대의 기기에서 사용 중이다. 아마도 더 중요한 사실은, 스톨먼이 현대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그 자체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오픈 소스 운동으로 향하는 지적 뼈대를 제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소프트웨어 세계에 성인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스톨먼은 오래전에 그 자리에 추대되었을 것이다.

그는 고집 센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저작권 부분 공유 비영리기관 ‘크리에이티브 커먼스’의 로렌스레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스톨먼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원래의 인터뷰에서 스톨먼은 말했다. “난 죽어버린 문화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속해 있지 않죠. 어찌 보면 난 죽는 것이 맞다는 느낌이 드네요.” 지금, 중국 음식을 앞에 두고 그는 이걸 재확인했다.“나는 태어났을 때 자살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내가 살아남아서 결론적으론 다행인 거죠.”

그의 말은 외로움의 표현이다. 외로움은 한때 집요한 컴퓨터 광집단이 가진 흔한 불만이었다.(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는 해커들이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려고 컴퓨터에 눈을 돌린 반사회적 낙오자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해커 문화가 퍼져나가면서, 해커 문화는 사회의 용인을 받게 되었다. 요즘 컴퓨터광은 낙오자가 아니라 잠재적인 거물로 간주된다. 이들은 한때 스톨먼을 괴롭혔던 극도의 고독을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톨먼이 한탄했던 상업화 덕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톨먼은 근본주의자이자 해커계의 후터파派다. 그의 개인 웹사이트는 블루 레이에서 조앤 롤링까지 온갖 대의명분의 적을 배척하자는 호소로 가득하다. 심지어 그는 예전의 동지와도 싸움을 벌인다. 특히 애플을 경멸한다. 애플의 폐쇄적 시스템과 디지털 복제 방지 소프트웨어 때문이다. 그는 애플의 제품을 조롱으로 바꿔 부른다. 음악 재생기는 ‘아이스크로드’, 모바일 기기는 ‘아이그로운’, 새로운 태블릿 컴퓨터는 ‘아이 배드’라는 식이다. 내가 <해커>를 곧 킨들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이미 스톨먼은 킨들을 스윈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침울한 태도를 벗어 던지고 전자책 독자를 옭아매는 DRM에 저항하라고 말했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믿어야 해요. 당신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리 펠젠스타인은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펠젠스타인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체제전복적인 지도자였다. 홈브루 컴퓨터 클럽은 PC 산업의 도약대였고, 스티브 워즈니악을 포함한 이곳의 회원들은 빌 게이츠가 쓴 공개서한의 대상이었다. 버클리 자유 연설 저항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펠젠스타인은 모두의 손에 저렴한 컴퓨터를 안겨주고 모든 이가 정보를 얻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진실의 더 올바른 모습을 향해 정보를 이용하고 널리 정보를 퍼뜨리게 될 터였다. 개인용 컴퓨터의 태동에서 그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개인용 컴퓨터가 민주화에 끼치는 영향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한다. 펠젠스타인의 말이다. “링컨스테펀스가 말한적이 있습니다. ‘나는 미래를 보았다. 그것도 제대로 돌아가는미래를.’ 하지만 난 그 말을 이렇게 바꾼 사람을 지지합니다. ‘나는 미래를 보았다. 그것도 잘 돌아갈 필요가 있는 미래를.’ ”펠젠스타인의 경력은 가지각색이다. 그는 오스본1 컴퓨터로 명성을 얻었지만 회사는 도산했다. 그 대신 요즘 펠젠스타인은 차세대 컴퓨터광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최근 그는 캘리포니아의 마운틴뷰에 위치한 해커 도장 설립에 힘을 보탰다. 해커도장은 월 1백달러의 회비로 80명의 회원에게 제대로 된 장비와 내부 네트워크를 갖춘 9500평방피트 규모의 DIY 작업실을 제공한다. 미국 전역에 위치한 수많은 해커 공간 중 하나이자, 외롭고 장비가 부족했던 컴퓨터광들에게 힘을 주는 기지다.

다음 세대
그린 블러트, 스톨먼, 펠젠스타인은 해킹을 이상적 집합체로 간주한다. 하지만 폴 그레이엄은 해킹이 경제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45세의 인터넷 도사이며 전성기엔 광적인 엔지니어였다. 신생 인터넷 기업 인큐베이터인 Y컴비네이터의 공동창립자인 폴 그레이엄은 1년에 두 번, 경합을 벌여 20~30개 회사를 선정한다. 선정된 회사는 초기 자금과 10주간의 훈련 캠프 입소 기회를 부여 받는다. 캠프의 마지막에서는 시연회가 열리고 엔젤 투자자와 벤처 투자자, 구글이나 야후처럼 인수에 굶주린 회사 관계자들이 몰려든다.

그레이엄은 가장 유망한 회사를 어떻게 골라낼까? 답은 쉽다. 해커를 찾으면 된다. “우리도 해커니까요. 같은 부류를 찾는 건 쉬운일이죠.” 그는 최초의 웹 기반 어플리케이션인 ‘비아웹’을 1995년에 만든바 있다. “해커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시스템을 통해 구현할 수도 있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전지구적인 해커죠. 컴퓨터뿐만 아니라 모든 걸 가지고 일을 처리할 줄 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레이엄마크 주커버그 2010 FE BERUARY GQ 6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모든 사업 분야가 해커가 운영하는 회사를 고용하거나 투자대상으로 삼고 싶어 한다. “시연회날 해커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너무 차려입으면 투자자는 당신을 멍청이로 생각할 겁니다.’ 투자자들은 갓 MBA를 딴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세르게이와 래리를 보러 오는 거니까요.”

해킹을 기업가적 효율성과 동일시하는 그레이엄의 말을 들으면 스톨먼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사업이 해킹의 가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견지해왔다. 그는 오히려 해킹이 사업을 지배했다고 생각한다. 직감적인 문제 해결, 의사결정의 탈집중화, 차림새보다 업무의 질에 대한 강조, 이 모든 것이 해커의 이상이며 이미 업무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신세대 해커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업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이디어와 혁신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펼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페이스북의 창설자이자 CEO인마크 주커버그가 그렇다. 그는 온라인에서의 사생활 공유로 4억 명의 사용자를 끌어 모았다. 그는 2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업의 달인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페이스북을 광고주와 홍보담장자들에게 과감하게 개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스스로를 해커로 간주했다. 지난해에 그는 인터넷 사업가지망생을 위한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는 해커문화를 만들려는 의지를 이미 갖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 그가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팔페이스북 본사를 방문했다. 그곳은 필자가 1983년에 <해커>를 집필하기 위한 작업실로 쓰려고 방을 빌렸던 바로 그 거리에 있다. 놀랍게도, 노스페이스 스웨터를 노상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주커버그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회사 사람들에게 1년간 업무시간에는 매일 넥타이를 매겠다고 약속한 것이 거의 끝나가는 중이라고 해명했다. 불황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은 페이스북에는 괜찮은 1년이었다. 사용자수가 두배로 늘고, 마침내 이윤도 생겼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매면 멋있긴 한데 목을 조르는 느낌이에요.”

주커버그의 방식은 해커 황금기의 방식과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업정신만큼은 다르지 않다. “우린 어마어마한 이론이 아니라 몇 주 동안 다 같이 해킹한 작업으로 시작했죠. 우리는 뭔가 빨리 만들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6주에서 8주간격으로 ‘해카톤’을 개최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하룻밤 동안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완수한다. “하루 밤만에 정말로 괜찮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이죠. 그리고 그것이 현재 페이스북의 개성이기도 합니다. 우린 빠른 움직임과 범위의 확장에 굳은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가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주커버그는 재능을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최고의 해커를 보유한회사가 승리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훌륭한 해커는 10명 또는 20명의 엔지니어와 맞먹지요.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를 마련하려고 하죠. 최고의 해커가 일하고 싶어하는 회사가 되고 싶어요. 우리 회사 분위기에서 해커들은 빠르게 뭔가를 만들고 환상적인 일을 해내고 엄청난 탁월함으로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죠.”

태초의 해커와 달리 주커버그가 속한 세대는 기기를 다루기 위해 뜯어보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없었다. 90년대 후반의 또래 해커들처럼 주커버그는 고급 언어를 갖고 놀았다. 덕분에 그는 기기자체보다 시스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주커버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닌자 거북이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사회를 구축하고 거북이들이 서로의사교환을 하는 놀이를 즐겼다. “난 그저 시스템이 움직이는 방식에 흥미를 가졌나봐요.” 그는 말한다. 컴퓨터를 갖고 놀기 시작할 때도 마더보드나 전화가 아니라 커뮤니티 전체를 해킹했다. 시스템의 버그를 이용해 메신저에서 친구들을 튕겨내는 식으로 말이다.

주커버그도 빌 게이츠처럼 해커의 이상에 등을 돌렸다는 비난을 받을 때가 많다. 다른 사이트에서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작성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커버그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은 페이스북의 기초이자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정보는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정보의 이용 대상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죠. 어디서든지 그게 해커 문화의 가장 핵심이라고 지적합니다. ‘정보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이죠.”

이전 세대 해커들은 상업의 세계가 해커 문화의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해커주의는 살아남아서 스스로의 유연성을 입증했다. 컴퓨터 서적 출판업자인 팀 오라일리의 말에 따르면, 해킹문화는 늘 새로운 수단을 찾는다. 큰 회사는 어쩌다 돌파구를 찾아 상품화하겠지만 해커들은 그저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다. 오라일리의 말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의 대사처럼 말이죠. ‘끝났어,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거지’.”

오라일리의 말에 따르면, 해커들이 목표로 하는 개척지는 수학의 영역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상이라고 한다. 프로그래머가 컴파일러를 통해 얻은 결과를 비행기 동체나 연에 응용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미 기업주의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체의 재미 때문에 일하는 순수한 해커는 투자자와 대차대조표에겐 관심 밖의 대상이다. 순수한 해커들은 다른 분야를 찾고 있다. 오라일리는 DIY 생명공학이 해커들의 주된 목표라고 말한다. 이전 세대 해커가 컴퓨터 코드를 주물렀던 것처럼 유전자 코드를 다루는 것이다. “아직은 재미수준의 단계죠.”

빌 게이츠도 지금 자신이 10대라면 생명공학을 해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DNA 조합으로 인공생명을 만드는거죠. 기계어 프로그래밍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게이츠는 빌 앤 멜린다 재단의 일을 하면서 면역학과 질병학의 전문지식을 키우게 되었다. “세상을 크게 바꾸고 싶다면 생명분자공학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컴퓨터가 충분히 보급되고 조작도 쉬워진 시대에 해커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분야로 생명분자공학을 꼽았다. “지금도 더 많은 기회가 있긴 하죠. 하지만 이건 개념이 다릅니다. 젊은 천재의 미친 듯한 열정과 개인용 컴퓨터 산업을 이끌었던 순수함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인간의 삶에 컴퓨터가 그랬던 것과 같은 영향을 줄 겁니다.” 다가올 혁명의 영웅도 해커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에디터
    글/ 스티븐 레비(Steven Levy)
    아트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션/정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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