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6년 전, 우리 가족은 50년 된 RV로 이사했다

2023.10.20신기호

미국 전역을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리할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69년식 닷지 트라브코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저자.

스콧 길버트슨 (SCOTT GILBERTSON)
온도계가 없다. 수천 마일 전, 사막에서 부서졌다. 그러나 엔진 도그 하우스 앞 통풍구에서 흐르는 라디에이터 액체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다. 그건 멈추라는 뜻이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318 엔진은 뜨겁게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1만2천 파운드짜리 RV를 등에 업고 산을 오른다면 결국 작은 엔진이 과열될 것이다. 차를 댈 곳을 찾기 시작한다. 없다. 도로 왼쪽은 다이너마이트로 드러난 암석, 석영, 석회암이 깎인 절벽이다. 동쪽에는 화이트 산맥(White Mountains, 미국 뉴햄프셔주의 산맥)의 척박한 바위 기슭이 먼지가 쌓인 갈색 사막의 계곡 바닥을 거품을 내며 깨끗이 닦는다. 여기저기에 크레오소트 creosote와 세이지브러시 sagebrush가 모여 있고, 종종 노란 토끼풀 덤불로 막혀 있다. 삭막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다. 차를 빼지 않아도 된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운전을 하는 최소 1시간 동안 다른 차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캘리포니아 동부 168번 고속도로 어딘가에 놓여졌다. 지난밤 캠핑했던 네바다의 유령 마을과 화이트산맥의 꼭대기 사이다. 나는 도로 한가운데서 멈추고 말았다. 엔진이 꺼지자 고요함이 찾아온다. 바람도, 새도, 대화도 없다. 나와 아내, 3명의 아이는 그저 라디에이터 캡에서 증기가 새어 나오는 희미한 소리와 엔진에서 냉각수가 콸콸 흐르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사막의 태양이 도로에 강렬한 빛을 비추는 10월이지만, 그늘이 있어 다행이다. 몇 분 후, 아내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주변에서 화석을 찾아보고 싶지 않니?” 1970년대 아이였던 나는 고장 난 차량을 옆에 두고 길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이 많다. 그 시절엔 다 그랬다. 내가 태어난 직후 병원에서 집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다 준 1967년식 폭스바겐 패스트백을 1976년식 머스터드색 VW 대셔로 바꿨다. 어린 시절 살았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투손 Tucson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 가는 도중 애리조나주 유마 Yuma 근처에서 과열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그 차를 저주한다. 캠핑카를 끌고 시에라 네바다 Sierra Nevada주를 넘기 바로 직전까지는 믿을 만했던 1969년식 포드 F-150도 있었다. 자동차를 고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필수 조건이었다. 요즘은 자동차 수리가 사치까진 아니더라도 종종 좋아서 하는 일일 때가 많다. 아버지는 그 F-150을 내게 물려줬다. 나는 직접 고쳐보고 싶었지만, 사실 겁이 났다. 만약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고장을 내면 어쩌지? 해킹할 수 없다면? 그때 나는 컴퓨터 프로게이머였다. 원칙적으로 코드를 고치는 것과 엔진을 손보는 건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는 뭐가 잘못됐는지 말해주지만, 엔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낡은 차를 고칠 땐 스스로 컴퓨터가 돼야 한다. 당시 나는 소프트웨어가 없는 컴퓨터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차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친구들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기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디지털과는 또 다른 성취감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주말, 나는 친구가 차의 브레이크에서 공기를 빼는 것을 돕기 위해 페달을 밟고 있었고, 친구는 섀시 밑에서 블리더 나사를 돌리고 있었다. 페달을 밟는 동안 기포를 제거하기 위한 저항이 형성되는 것을 느끼면서 촉각적 피드백을 받았다. 나는 비로소 푹 빠졌다. 엔진을 수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선 F-150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가진 나만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2015년 6월, 아내와 나는 1969년식 닷지 트라브코 Dodge Travco를 구입했는데, 50번째 생일을 앞둔 때였다. 아이들은 버스라고 불렀다. 적절했다. ‘모터 홈’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오래된 닷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떠올린다. RV라고 부르는 건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 이탈리아 출신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현악기)를 바이올린이라 지칭하는 것과 같다. 트라브코는 27피트 길이의 유리 섬유로 된 아름다움과 기쁨을 담은 존재다. 1960년대의 청록색과 흰색으로 칠해졌고 휘몰아치는 곡선 모양에 둥근 창문이 있다. 베이지색 현대식 RV들 틈에서도 대담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트라브코는 잡지 <플레이보이>에도 실린 적이 있을 정도로 멋졌다. 싱어송라이터 조니 캐시 Johnny Cash와 존 웨인 John Wayne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집으로 만들기 위해 트라브코를 구입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주택가에 싫증이 났고, 아이들에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더 깊이있게 이해하길 바랐다. 책을 통해 사막과 숲, 산을 아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길 바랐다. 아이들이 남부와 중서부, 서부, 북동부의 차이를 알길 바랐다. 스스로의 땀과 노력으로 길을 걸어갈 때 느끼는 좌절감과 기쁨의 감정을 배우길 바랐다. 자립심과 동반하는 고집과 이상의 차이를 깨닫고, 고칠 만한 건 무엇이고 고칠 수 없는 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168번 고속도로에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 있자니, 우리의 집이자 버스는 마치 내 자아가 더듬거리는 손가락과 도구로 현금화할 수 없다고 써놓은 거대한 수표 같았다. 사실 나는 자동차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수리나 복구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 할아버지는 통신 회사에서 일했고 투산에 있는 그의 집 뒤에는 연장들로 가득한 창고가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는 중고 시장에서 고장 난 물건을 산 뒤, 다시 고쳐서 판매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름에 할아버지의 창고는 더웠지만, 나와 사촌들은 더위도 잊은 채 신이 나서 할아버지가 전화기나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물건을 분해하고 고치는 걸 지켜보곤 했다. 아버지의 창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망치와 줄자를 갖고 놀았고 모형 비행기를 만들며 자랐다.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책장이나 탁자, 의자를 스케치한 다음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어린 시절, 몇 가지 목공 기술을 익혔지만, 아마도 좋은 장비와 멘토가 있었다면 더 훌륭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몇 년 후, 매튜 크로포드의 베스트셀러 수공예 안내서 <Shop Class As Soulcraft>에 있는 한 구절이 내 멘토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존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특히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생겼을 때 그 성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그는 집에 가서 밸브 커버를 벗겨 직접 문제를 해결한다. 아마도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문제가 무엇이든 노력하면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다시 밸브를 조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안 되더라도 끝까지 해볼 작정이다.”수리 세계의 핵심은 ‘안 되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것’이다. 기꺼이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첨단 기술 시대의 제품들은 나사를 풀면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거나 보증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스티커로 뒤덮여 있다. 존 디어 John Deere 같은 회사는 심지어 구매자나 제3자가 직접 수리하는 걸 제한한다. 그 스티커는 우연이 아니다. 제조업체는 구매자가 직접 수리할 수 없다고 설득하며 DIY 수리와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

트라브코의 창과 아이들의 침대 곁을 지키는 못난이 인형들.

하지만 소비하는 것 이상으로 물건을 소유하고 제품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먼저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제조사가 구매자의 수리를 경고하는 스티커를 붙이든 말든, 일단 시작해야 한다. 현재 이 세상에 트라브코는 많이 남지 않았지만, 2015년 6월, 몇 달 동안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 온라인 커뮤니티)를 파헤친 끝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산 근처에서 판매하고 있는 트라브코를 발견하고 말았다. 빈티지 트레일러를 복원한 부부가 테네시주 어딘가에서 버스를 발견하고 수리를 시도했지만, 마음이 바뀌어 판매를 결심한 것이다. 며칠 후, 나는 언덕 위에 서서 버스를 내려다봤다. 물로 인한 손상이 있었지만,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행히도 엔진에 무지했다. 시동 거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한 번 엔진이 켜지자 내 귀에는 충분히 좋게 들렸다. 나는 돈을 건네고 운전석에 앉았다. 첫 드라이빙은 정말 충격이었다. 27피트 길이의 차량, 특히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 없는 차를 몰고 내리막길을 향하는 건 일반 운전과 다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시운전을 해봤을 테다. U자형 도로를 몇 번 돌아보니 손바닥에 땀이 났다.(캔자스에서 다음 차를 사리라 스스로 다짐하면서.) 4차선 도로에서는 다뤄볼 만했다. 몇 시간 동안 긴장해서 운전을 하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연식이 얼마나 됐나요?, 어떻게 구했나요?” 올드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질문도 했다. “어떤 엔진이 들어 있나요?” 정답은 5.2L의 소형 블록 V8 엔진인 크라이슬러 3 18 L A이다. L A는 경량 A시리즈 엔진(Light A-series)을 의미한다. 이것은 닷지가 1969년에 만든 다트부터 D100 트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차량에서 사용하는 엔진이다. 440과 같은 대형 V8은 빈티지 레이싱광들에게 더 인기가 많지만, 318(대부분의 마니아들은 이렇게 부른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머슬카 시대의 영웅이다. 어떤 사람들은 318의 실린더 내경 크기가 다트보다 더 크기 때문에 보다 나은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여전히 확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네바다의 사막 언덕에 있는 산허리를 올라갈 때, 확실히 닷지 다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정상에서는 8천 파운드의 무게가 실린다.)

처음 트라브코를 운전하고 휴게소에 들렀을 당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엔진 이름, 센서, 컴퓨터 칩, 자동화 등 현대 차량의 복잡성이 부족하다는 것뿐이었다. 트라브코와 함께한 첫해에는 내부를 다시 만들었다. 2016년 대부분을 차 안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울에는 추위에 덜덜 떨며 이웃들이 낯선 이들에게 길을 설명할 때, 우리 차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파란색의 큰 버스 뒤에 있어요”라고. 나는 내부를 파헤쳤다.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필요할 경우 고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설계하고 싶었다. 백업 카메라, 자동화된 차양막이나 시스템도 전혀 없었다. 비전기식 파일럿 조명 시스템을 갖춘 온수기를 찾아 헤맸다. 캠핑장에서는 늘 나가서 손으로 불을 붙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전하게 실패 없이 불을 붙일 수 있다. 어떤 친구는 내게 TV 드라마 <배틀스타 갈락티카>의 아마다 선장이냐고 농담을 하곤 했다. 아마다 선장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를 배에 싣지 못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술에 반대한 건 아니고 특정 기술을 불신했다. 드라마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스템은 인류를 파괴하는 살인 로봇에게 지배되고 만다. 우리는 그 정도로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그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칠 수 있는데, 멀리 떨어져 무언가가 파손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술의 이점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절충안이어야 한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고, 버스에는 태양 전지판과 배터리 같은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시스템이 있다. 내 생각에 아마다는 수년 동안 태양 전지판을 주요 전력 공급원으로 사용했을 테다.. 물론 휴대 전화로 태양 전지와 배터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 편리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이러한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배선 게이지가 있는 션트를 설치했다. 블루투스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또는 휴대 전화를 분실한 경우) 게이지만 보면 된다. 나도 아마다처럼 모든 기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기술이나 단일 실패 지점에 반할 뿐이다. 고인이 된 코미디언 미치 헤드버그 Mitch Hedberg는 어떻게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농담을 하곤 했다. 웹디자인계에서는 이를 “우아한 성능 저하”라고 부른다. 기술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얼마나 우아하게 실패하느냐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현대 디자인은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편리하다는 명목으로, 복잡한 시스템은 기만할 정도로 단순한 사용자의 인터페이스 뒤에 숨어 있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때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그 뒤에 숨겨진 복잡함은 자연적이고, 본질적으로도 깨지기 쉽다. 가끔 불편함이 장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자동 조종 장치를 강제로 떼고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방법도 있다. 트라브코만큼 오래된 엔진을 다루면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다. 입문의 대가다.

닷지 트라브코 내부 모습.

2017년 4월 1일, 우리 가족은 버스에 올라타 길을 떠났다. 아내는 잘 풀리지 않으면 만우절의 나쁜 장난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4월 2일, 집에서 1백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첫 번째 문제에 부딪혔다. 조지아주에 있는 캠핑장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자몽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엔진 아래로 들어갔다. 얇고 따뜻한 붉은 액체가 이마에 튀었다. 라디에이터 하단에서 변속기 유체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변속기로 돌려보내기 전유체를 냉각하는 라디에이터 밑으로 흐르는 두 개의 송전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오일 레벨이 정상이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자동차 수리 때문에 새로운 삶의 시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침 루틴으로 변속기에 오일을 리필하기 시작했다. 처음 3주 동안 변속기 오일을 많이 사용했다. 매일 아침 길을 나서기 전에, 그리고 차에 주유를 할 때마다 오일을 보충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효과가 있지만, 필연적으로 근본 원인은 더 악화된다. 캐롤라이나 해안 서부로 내려갔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지아 해안의 바람이 불어오는 습지를 지나 플로리다 팬핸들 Florida panhandle에 이르렀다. 주립공원과 국립공원의 야영장에는 굴착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누수 문제를 미루곤 세인트 조지섬 해변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수리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도착한 날, 누수 문제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변속기 오일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 진입로에 차를 세웠다. 이 시점에서 그 문제가 나를 압도했다. 너무 큰 일처럼 보였지만 빨리 내려가고 싶은지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1시간 동안 전화로 이 크고 오래된 자동차를 고쳐줄 수리공을 찾았다. 마침내 그 일을 해줄 사람을 찾았고, 며칠 뒤 지갑이 아주 가벼워졌다. 정비공에게 갈 때마다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다. 왜 직접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핑계(아이들과 놀고 싶어 시간이 없었다)를 만들었지만 사실은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와, 걸프 해안의 백사장을 따라 서쪽으로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를 거쳐 뉴올리언스로 갔다. 도로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를 응원했다. 두 달 동안 버스는 별일없이 잘 달렸다. 무더웠던 6월, 텍사스에 도착했을 때 온도계는 계속해서 빨간 선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운전대를 잡은 것은 도움이 됐지만, 뭔가 더 필요했다. 우리는 친척들을 방문하기 위해 달라스에 도착했다. 또 다른 정비사에게 라디에이터의 문제를 확인하고 원인을 제거했다. 댈러스에서 1시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온도계가 다시 빨간 선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또 수리점에 들러 워터 펌프와 온도계를 교체했다. 더 더워지기 전에 일찍 마을을 떠났다. 효과가 있었다. 온도계가 다시 올라갔다. 온도 문제와 텍사스의 극심한 더위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도박을 걸었다. 애머릴로 (Amarillo)에서 호텔을 잡아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삼촌에게 전화를 했다. 삼촌은 잠시 내 얘길 듣더니, 엔진이 작동할 때 온도 총을 가지고 상황을 보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근처 철물점에서 온도 총을 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30분마다 멈춰 엔진의 윗면과 아랫면에 측정값을 찍었다. 모든 것이 정상 한계 내에 있었다. 한낮의 더위에 온도가 다시 올라갔지만, 총으로 측정한 값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삼촌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너라면, 엔진에서 온도 센서를 뽑아 사막에 던져버릴 거야”라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가 나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문제를 고치기는커녕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삼촌이 언제부터 자동차 수리를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나보다 서른 다섯살이 많다. 탐구 정신을 좇는 35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엔진 센서에서 온도계의 고리를 풀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닫고 행복했다. 결함이 있는 15달러짜리 센서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 수천 달러를 생각하면 행복하진 않았다. 내가 행하고 있는 시간 대비 학습 성취도도 시원찮았다.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느낌이었다.

두 달 후, 로키산맥의 시원한 소나무 숲에서 보낸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콜로라도주 리지웨이 Ridgway 근처 1만 피트 길이의 고갯길을 넘어보기로 했다. 예전에 9천6백 피트가 넘는 길이는 성공했는데, 그때는 로키산맥처럼 가파른 오르막길이 아니었다. 일찍 출발했지만, 등산로로 1마일도 더 들어가지 못하고 낯익은 자몽 냄새를 맡았다. 차를 세우고 밑으로 기어가니 변속기 쿨러 라인에서 다시 물이 새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다시 리지웨이에 돌아와 샛길에 주차를 하고는 다시 차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았다. 전송선 끝 너트를 풀었을 때, 라디에이터의 금속 파이프에 금이 갔을 뿐만 아니라 덩어리 전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금속 피팅 위에 단단히 고정된 씰이 있는 대신 유체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변속기 쿨러 라인은 엔진 측면을 따라 느슨함 없이 장착돼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자르고 새조명등을 넣은 다음 다시 붙이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배기가스에 거의 닿았을 테고, 변속기 쿨러가 냉각시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열이 발생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차가 들어갈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는 철물점을 찾아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몬트로즈 Montrose에서 30마일 떨어진 가게를 찾았다. 기존의 줄을 최대한 다시 연결하고 리지웨이 주립공원 캠프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텐트 캠핑에 필요한 것들을 추려 짐을 챙겼다. 그날 저녁, 야영장의 세탁실 밖에 앉아 시마론산맥 Cimaroon Range을 가로지르는 로키산맥의 유명한 황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야영객이 빨래를 하러 왔다. 그는 세탁기에 옷을 쑤셔 넣었고 우리는 대화의 물꼬를 텄다. 늘 그랬듯이 차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엔진에 대해 묻고 나서, 나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직접 렌치를 돌리나요?”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고 말했지만, 종종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직접 렌치를 돌릴 줄 알아야 해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러면, 그런 차를 가질 수 없죠.” 나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몇 달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그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스스로 렌치를 돌리지 않고 이런 차를 갖게 된다면, 미쳐버리거나 파산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이번이 정비사에게 의지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맹세했다. 몬트로즈에 있는 정비사에게 갔다. 우리가 텐트에서 몇 주를 보내는 동안, 정비사는 새로운 송전선로를 설치했다. 2주 후, 서부 유타주를 지나 시온 국립공원 Zion National Park으로 내려오면서 주유를 하려고 차를 세웠다. 그때 차 밑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을까?

작은 트렁크에는 크고 작은 수리 키트가 가득 들어 있다.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유타주의 여느 일요일처럼 문을 닫은 정비소 건너편 뒷길에 차를 세웠다. 나는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송전선의 조명등에 또 금이 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았지만, 장비도 없었고 철물점도 문을 닫았다. 나는 트라브코 계단에 걸터앉아 손에 묻은 기름을 닦았다. 아내가 이제 어떻게 하냐고 말했을 때 맞은편 가게의 금속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내 또래의 남자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문제를 말했다. 그는 그 철물점의 주인이었다.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지만, 개인 작업 때문에 그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함께 송전선을 뽑아 안으로 가져가 금이 간 조명탄을 끊고 다시 점화했다. 내 마지막 정비사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보여줬다. 금속 너트를 너무 조인 탓에 금이 간 것이었다. 부드럽게 너트를 조였다. 그는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언젠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트라브코와 함께 모험을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 우리는 동부 캘리포니아의 사막 산길 도로 한가운데 해변에 있었다. 그때쯤 나는 엔진 과열 현상은 실제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엔진이 큰 언덕을 오를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래된 차는 인내심을 비롯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나는 굽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길을 따라 걸었다. 어쩌면 산등성이에 아스팔트 도로가 솟아 있거나, 강이 흐르고 있는 시원하고 무성한 계곡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곡선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었지만 몇백 야드 이상이 보이지 않았고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나는 포기하고 차로 다시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 역시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엔진이 식어 우리는 산을 한 번 더 오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 정도 경사면에서는 다시 과열되기 전 1마일을 주행해야 했다.(주행거리계가 고장 났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약 5분 뒤, 나는 철수했다. 라디에이터 유체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도로를 벗어나기로 했다. 나와 아내는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나를 항상 미소 짓게 만드는 소리를 들었다. 할리데이비슨 특유의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큰 엔진이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몇 분 후 오토바이가 등장했고, 운전자는 우리를 향해 괜찮은지 물었다. 우리는 차에 대해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는 꼭대기에서 겨우 1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갑자기 피곤함이 가셨다. 산을 넘는 일이 가능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고, 그는 길을 떠났다. 우리는 엔진이 열을 식힐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1시간 뒤, 우리는 다시 시도했다. 긴 거리였고, 시속 20마일을 결코 넘지 못했지만 얼마 후 우리는 산등성이에 올랐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달리고 있는 1969년식 닷지 트라브코.

발 아래에는 캘리포니아 오웬스 계곡 Owens Valley의 장관이 펼쳐졌다. 안개 낀 계곡 사이로 시에라 네바다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정상에 다다른 것이다. 1차선 도로 앞에 ‘주의’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기 전까지 잠깐의 여유가 있었다. 이러한 고속도로를 내로우즈 Narrows’라고 하는데, 계획을 세울 시간 없이 너무 빨리 만났다. 다행히도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는 없었다. 가파른 경사면을 내려오면서 브레이크를 몇 번이나 밟았다. 약 3시간 동안 내리막길을 달린 후, 캘리포니아주 빅 파인 Big Pine 외곽에 있는 야영장에 차를 세웠다. 이맘때쯤이면 길은 텅텅 비어있고, 도로는 바퀴 자국으로 가득 차서 차가 비틀거리고 삐걱거렸다. 첫 야영지에서 20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서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 아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깊은 안도감에 차를 세우고 마지막으로 시동을 껐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해가 동부 시에라 네바다의 높은 봉우리를 밝히는 모습을 바라봤다.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홀짝홀짝 마셨다. 근처에서 기차 박물관을 발견하고는 아이들을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동을 걸고 엔진이 예열되는 동안 든 창, 해치, 환기구가 닫혀 있는지 확인하며 버스 주변을 거닐었을 때, 10시쯤이었다. 운전석에 앉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뒷바퀴가 이상하게 바퀴 구멍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바퀴는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전체 축이 움직인 것이다. 이런. 무릎을 꿇고 프레임 아래를 살폈다. 약 5천 파운드를 지탱하는 후방 차축은 2개의 마운트(전면에 하나, 후면에 하나)로 고정된다. 이들은 리프 스프링을 제자리에 고정시킨다. 마운트는 각 모서리에 하나씩 4개의 용접된 강철 핀으로 고정되며, 이 핀은 차축 마운트와 섀시를 연결한다. 문제는 운전석 쪽에 있는 전방 차축의 핀 4개 중 3개가 사라진 것이다. 핀 1개가 마운트를 매달고 있었고 아래로 흔들리며 후방 차축 전체가 약 6인치 뒤로 움직였다. 만약 이동 중에 핀이 부러졌다면 뒤쪽 바퀴가 빠졌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삼촌이 내게 반복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너트와 볼트 문제야.” 하지만 그게 아닐 때도 있다. 문제는 대부분 머릿속에서 해결되곤 한다. 그 능력은 수년에 걸쳐 생긴다. 그러나 무언가가 잘못됐을지 모른다는 판단이 설 때, 전염성 있는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또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트라브코의 영업사원들, 정비사들 등 318 엔진을 알고 있던 수십 명을 만났다. 그들은 비록 위로의 말일지라도 우리의 계속된 도전을 응원하며 어떤 식으로든 도와줬다. 하지만 핀 하나에 매달려 있는 차축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삼촌에게 사진을 보냈다. 몇 분 뒤 빅 파인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삼촌에게서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전화가 왔다. 장비를 싣고 오후 즈음 도착할 것이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강으로 하이킹을 하러 갔다.(우리에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역시 일이다.) 오후 3시쯤, 삼촌은 리프트와 잭등 장비를 가득 실은 트럭과 함께 나타났다. 함께 차 아래로 기어 들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제를 살폈다. 밖으로 나오자 삼촌은 “고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철물점으로 가서 8등급짜리 강철 볼트를 샀다. 그리고 식자재 마트에서 스테이크와 감자를 조금 샀다. 삼촌은 “긴장을 풀고 이 상황을 즐겨야 해”라며 나를 토닥였다. 저녁 식사 후 삼촌은 내게 계획을 일러주었다. 2개의 잭을 사용할 건데, 하나는 차를 지탱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축 마운트를 제자리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플랜지 정렬 도구를 이용해 차축 마운트에 있는 구멍을 섀시에 있는 구멍과 맞춘 다음, 8등급까리 볼트를 끼울 예정이었다. 계획은 간단하고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플랜지 정렬 도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더 단단한 볼트가 있는지도 몰랐다.다음 날 하루 종일 작업을 했다. 차축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삼촌은 엔진 소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삼촌은 “우리 집에 와보는 게 어때? 소음을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기차 박물관에 갔고, 우리는 온천에서 수영을 했다.

며칠 뒤 삼촌의 집에 들러 엔진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웠다. 이것이 트라브코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고, 6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 계속 살고 있는 이유다. 내가 아는 사람들, 만난 사람들, 도움을 준 사람들 중 몇몇은 전문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브레이크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진공 부스터를 다시 만들었다. 헤드 개스킷, 마모된 벨트 몇 개, 고장 난 교류 발전기, 전압 조절기, 연료펌프를 바꾸고, 스파크 플러그, 와이어, 오일을 교체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유지 보수 작업을 해야 했다. 정비사에게 상담을 받진 않지만, 여전히 정기적으로 삼촌에게 문자를 보내 조언을 구한다. 이제 트라브코를 수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는 달라졌다. 더 이상 엔진을 경외하거나 신기해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숙달됐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부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안다. 그러나 잘못될 수도 있고 잘못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동차 마니아들이나 정비사들이다. 자신의 렌치를 돌리고 있는 모든 사람을 존경한다.

    스콧 길버트슨 (SCOTT GILBERTSON)
    포토그래퍼
    브리아나 바르가스 (BRIANA VARGA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