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공격적 기풍

한 바둑평론가는 그를 두고 ‘지상 최대의 전신, 기발한 착상과 번뜩이는 감각은 가히 천하를 횡행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썼다. 반상의 파이터이자 바둑계 최고의 이슈메이커에게 던진 18개의 질문.

미소 뒤의 카리스마 누군가는 그의 바둑을 두고 ‘복싱으로 치면 인파이터요, 축구로 치면 토털 사커’라고 했다. 그러니, 당신, 저 여리디 여린 미소에 속지 마라.

올해만 3단에서 9단으로 수직상승하면서 종전 이창호 기사의 최연소 기록을 모두 깼다. 당신에게 바둑 9단, 즉 ‘입신’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이창호 기사가 9단으로 승단하던 시절과 비교할 때, 요즘은 단의 권위가 많이 떨어져 있다. 초단이 9단도 곧잘 이기지 않나? 몇 단인가보다 실력 위주라는 얘기다. 입신은 바둑이나 한 인간으로서 완성됐다는 의미일 텐데, 내가 그런 것 같진 않다.

면도날 기사로 불렸던 사카다와 기성 오청원이 바둑을 뒀을 때, 오청원의 첫 수를 본 사카다가 돌을 던지면서 ’34수 앞까지의 변화를 꿰뚫고 있다’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우문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몇 수 앞까지 내다보나? 쉬운 부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어려운 부분에서는 한 수 앞도 보기 힘들다. 한 수를 두더라도 열 몇 가지 갈래로 나갈 수 있어서 변화를 다 읽는 게 쉽지 않다.

<GQ> 8월호 기사 중 ‘최고에게도 아킬레스는 있다’ 바둑 파트에 이창호 기사의 아킬레스가 언급됐었다. 기가 드세고 전투적인 기풍이 약한데, 그런 상대로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의 약점 역시 슬쩍 등장하는데, 수비가 약해서 기복이 심하다는 거였다. 특별히 이창호 기사가 약한 부분은 없다. 내 경우 수비가 약한 게 아니라 초반이 워낙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국 초반에 약한 약점이 있다. 그것은 내가 평범하게 포석을 짜는 편이 아니고 변화를 추구하는 편이어서 그렇다.

사람들은 바둑이 인생을 은유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나이 어린 기사들이 최고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옛날에는 바둑이 완성되려면 사람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 바둑이 기교 쪽으로 많이 기우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바둑 이외에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어떤 것인가? 글쎄… 관심을 가지고 싶긴 한데, 아직 찾지 못했다. 사람이 바둑만 두고 살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언제나 바둑을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천재로 불리며 관심을 끌었지만 프로 입문 이후 몇 년간 당신의 성적은 평범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지난 2000년에 32연승의 대기록(산술적 확률 43억분의 1)을 작성했다. 그 이전과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95년에 입단했는데 실력보다 운이 더 따랐다. 당연히 초반에는 성적이 안좋았지만 97년 이후부터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신감도 생기고, 실력도 늘면서 99년부터는 좋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승단대회? 실익도 없이 헛고생하기 싫다”, “존경하는 기사 없다”, “앞으로 한 판도 지지 않는 게 목표다” 등등의 코멘트를 비롯해 드림리그와 신라면배 불참 선언으로 이슈메이커가 됐다. 이런 호언을 즐기는 배경엔 뭐가 자리잡고 있나? 쇼맨십이나 이미지 메이킹은 아니다. 드림리그 불참은 단체전 성격을 싫어하는 것도 이유였고 기전의 성격이 변한 것도 이유였다. 내 생각이 옳다기보다는 기전 자체의 설득력이 떨어졌다. 신라면배 같은 경우는 이창호 기사가 세계 최강이긴 하지만 기준 없이 시드를 주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발언들 때문에 가끔 건방지다는 소리도 듣지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드림리그 불참 선언을 두고 어느 바둑 담당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다. “’팬들은 행동이 아름답지 못한 최강을 원하지 않는다’는 한 바둑팬의 따끔한 충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그거야 뭐… 내 입장에선 기분이 나쁘다. 바둑팬들은 상금이 적어서 불참했다는 정도만 알 뿐, 속깊은 내용은 모르니까 그런 지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판도 지지 않는 게 목표다”라고 호언했지만 지난 4~5월 성적은 2승 6패였다. LG배 우승 이후의 성적인데, 세계 대회 우승, 이창호 기사를 꺾는 등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는 생각에 목표감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컨디션도 나빴고, 하지만 불패는 여전히 버릴 수 없는 목표다.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기사에 대한 품평을 한다면? 조훈현 9단은 유연함과 강한 면이 잘 조합된 바둑이지만 끝내기나 세밀함을 요하는 부분에서 아쉬운 대목이 있는 것 같다. 유창혁 9단은 너무 유연하게만 두려 하고 돌의 흐름을 쫓아가는 스타일이어서 가끔 허점을 보일 때가 있다. 이창호 9단의 바둑은 ‘너무’ 공격적이 아니다. 이창호 9단의 흐름대로 흘러가면 상당히 무서운 바둑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주 편한 상대가 되어버린다.

조훈현 기사는 빠른 행마와 정확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한 무시무시한 전투력, 유창혁 기사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 불릴 정도인 공격력과 실리 추구가 장점으로 꼽힌다. 당신 역시 공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공통점은 공격을 하면서 득을 보는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조훈현, 유창혁 기사가 집을 위주로 한다면 난 두터움 위주로 공격하는 게 차이점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더 공격적이고 파괴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바둑과 다른 이세돌만의 바둑을 직접 설명한다면? 세 기사의 장점을 혼합한 듯한 느낌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상당히 무서운 바둑을 두지만 컨디션이 나쁠 때는 무력감이 느껴지는 바둑이다. 내 경우 평소에는 애매모호한 부분에서 완벽한 선택을 한다. 한 집이라도 득 보는 쪽으로. 하지만 컨디션이 나쁘면 그런 판단이 어렵다.

분패했다고 느꼈던 대국과 가장 기뻤던 승부를 꼽는다면? 분했다기보다 아쉬웠던 대국은 2001년에 이창호 기사와 결승전을 치렀을 때다. 최고 기억에 남는 대국은 2002년 후지츠배 결승에서 유창혁 9단과 대국한 것과 올해 LG배 결승에서 이창호 기사와 겨룬 거다.

늘 이창호 9단과 함께 언급되고 라이벌로 불린다. 반면 이창호 9단과 맞붙기엔 아직 멀었다는 평가도 있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멀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이 차가 여덟 살이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세대 차도 있다. 그냥 선후배로 부르는 게 옳은 것 같다.

2001년 이창호 9단의 슬럼프에 대해 한 바둑평론가는 줄곧 바둑만 생각해온 이창호가 ‘지루하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데서 원인을 찾았다. 당신은 어떤가? 지루하다기보다는 차별을 둔, 재미있는 바둑을 두고 싶은 생각이 더 많다.

바둑 9단에게는 우문일 수 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바둑의 매력은 무엇인가? 요즘은 컴퓨터 게임도 많이 나왔지만, 공평하게 단 둘이서 승부하는, 승부라기보다는 수담(手談)을 나누면서 상대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당신이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대국 상대를 꼽는다면 누가 있나? 누구에게도 자신 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껄끄러운 상대를 느껴본 적이 없다.

당신이 속한 한국 바둑은 현재 세계 최강이다. 어떤 바둑 기사로 기억되고 싶나? 바둑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기사라는 평을 듣고 싶다.

* GQ KOREA 2003년 9월호에 실린 이세돌 기사와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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