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만에 발렌시아가 쿠튀르 컬렉션이 부활했다. 기존 쿠튀르 컬렉션의 틀을 깨부순 ‘젠더 플루이드 쿠튀르’를 표방한 뎀나 바잘리아의 컬렉션을 보고 난 뒤, <지큐 코리아>가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을 관통한 평등함과 혁신,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GQ 성공적인 쿠튀르 컬렉션 데뷔를 축하한다. 최근 당신의 행보를 보면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느껴진다.
DG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나는 2016년부터 개인적으로 중요한 전환기를 거쳤다. 패션에 대해 갖고 있는 비전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드러났으리라 믿는다. 지금의 나는 내 자신과 더 강하게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뿐 아니라 요즘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예전보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GQ 팬데믹 이후 침체됐던 패션은 오트 쿠튀르와 함께 다시 부활한 듯하다. 당신을 비롯해 많은 디자이너가 쿠튀르 컬렉션을 기점으로 오프라인으로 복귀했다.
DG 어찌 보면 이번 팬데믹 사태가 모두에게 속도를 조금 줄이고 진정 가치 있는 것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 것 같다. 나 역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뭔지 다시 찾기 시작했는데, 내게 패션의 본질이나 정수는 쿠튀르였다. 쿠튀르야말로 패션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쿠튀르를 유의미하게 풀어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현대적인 것이고, 앞으로 패션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굉장히 절박하게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GQ 어떤 프로세스로 컬렉션을 완성했는지 궁금하다. 레디투웨어를 만들 때와의 차이점은 뭔가?
DG 쿠튀르는 준비하는 과정이나 작업하는 방식이 레디투웨어와 매우 다르다. 일단 피팅 세션이 세 배로 늘어나고, 컬렉션 전개와 디자인 관련해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꽤 고무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GQ 이번 쿠튀르 쇼에는 당신이 레디투웨어에서 보여준 아이코닉한 디자인인 세트백 칼라 Set-Back Collars, 쿠튀르 진 Couture Jeans 유틸리티 재킷 Utility Jacket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도들이 눈에 띄었다. 필립 트레이시와 함께 만든 우주선 모양의 모자라던지.
DG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시대에는 모자가 여성복과 남성복의 전체적인 실루엣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과감한 디자인의 모자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아이템일 수 있지만, 시각적 강렬함 덕에 그런 쓸모 없음이 쿠튀르의 콘셉트 안에서 완전히 정당화되는 결과가 탄생했다. 앞으로도 모자 디자인을 계속해서 내놓을 계획이긴 하지만 모자가 컬렉션의 핵심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험적인 작업에 가깝다는 게 맞을 것이다. 모자만 있으면 모든 게 순식간에 엄청 우아해지지 않나.
GQ 쿠튀르 컬렉션에도 데님 룩이 여러 벌 등장했다. 데님 소재를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DG 내 옷을 찾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데님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이번 쿠튀르 컬렉션에 데님이 꼭 포함되어야 했다. 다만 아무 원단이나 사용한건 아니고, 일본에서 수제 방식으로 직조한 굉장히 특별하고 귀한 데님을 사용했다.
GQ 가장 애착이 가는 룩은?
DG 가장 애착이 가는 룩이라면 아무래도 강렬한 오렌지 빛깔의 앙상블을 꼽을 수 있다. 아이코닉한 발렌시아가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도록 나름대로 재해석해본 건데, 만드는 과정이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재킷이기도 했다.
GQ 비대면으로 새 시즌 패션 위크와 프레젠테이션을 감상하고, 팀원들과 줌으로 회의하며, 페이스북과 유튜브에서 또 다른 자아로 소통하는 시대다. 발렌시아가는 어떤 패션 브랜드보다 빠르게 패션의 디지털화와 가상화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행보는 쿠튀르의 가치와는 상반되지 않나?
DG 우선, 나는 줌이 정말 싫다. 특히 피팅을 줌으로 하는 건 참기 어려울 정도다. 손을 뻗어 만지거나 재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으로 옷을 보기만 하라는 건 내게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내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한 새로운 디지털 도구를 발견하고 사용하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그렇다 해도 눈앞에서 직접 패션을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쿠튀르는 특히 더 그렇다. 실제로 경험했을 때 백 배는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내가 매년 7월에 파리에서 쿠튀르 쇼를 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레디투웨어와 관련해서는 디지털로 공개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더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GQ 쇼를 보고 당신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사이에 생각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도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이 유행하던 시대에 드레이핑과 볼륨을 살린 의상을 디자인했고, 정형화된 외모의 모델을 선호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화려함을 좋아한다는 점과 시대를 관통하는 남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DG 맞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둘 다 원하는 바가 분명하다는 점이 가장 큰 공통점이 아닐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다. 게다가 나도 드라이 마티니를 좋아한다. 하하.
GQ 이번 시즌 당신을 비롯해 많은 디자이너가 남성을 위한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다. 물론 당신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성별과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평등한 디자인을 추구해왔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당신이 생각이.
DG 원래 여성복 쿠튀르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 옷들을 입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질투심마저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굳이 여성복이어야 하는지 고민했고, 현대적인 쿠튀르를 만들겠다면 특정 성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너무나도 낡은 사고방식이고, 나랑은 맞지 않는 접근법이기도 하다. 고민한 결과 쿠튀르를 ‘젠더 박스’에서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내 옷을 갖고싶어 하고 구매할 의사가 있는 모두를 위한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GQ 남성복에서 쿠튀르에 가장 가깝다고 이야기되어 온 비스포크 테일러링은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새빌 로의 재단사들이 테일러 숍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맞춤복이 다시 각광받는 시대가 올까?
DG 비스포크 테일러링은 이제 너무 구식이 되었다. 앞으로 살아남으려면 실루엣은 물론이고 입는 사람의 신체와 라이프스타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게 닿을 수 있어야 하고 편해져야 하며, 조금 더 쿨하고 날카로워져야 한다. 영국 귀족처럼 보이고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비스포크 테일러링은 꽤 위태로운 상황인 듯 보인다. 노하우와 장인정신은 점점 사라져가는데 여전히 40년 전과 똑같은 스타일의 재킷과 팬츠를 내놓고 있지 않나. 젊은 세대가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으려 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닌 셈이다.
GQ 디자인과 마케팅을 아우르는 당신의 선구안은 발렌시아가가 MZ세대 소비자를 사로잡은 원동력이다. 쿠튀르의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DG 쿠튀르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사실 쿠튀르처럼 디자인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고차원적인 작업을 진행하면서 돈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물론 지속 가능할 정도의 수익을 내는 건 필요하겠지만 나는 쿠튀르를 만들 때 금전적 이익이 아닌 조형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람들이 내 컬렉션을 보며 다른 옷들과의 차이를 느끼고 옷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옷이 사람의 정신과 꿈, 그리고 욕망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고, 가격과 상관없이 차별화된 소비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지만 올 7월에 쿠튀르 제품을 한 개 또는 몇 개씩 주문한 MZ세대 고객들이 남녀 구분 없이 꽤 있었다. 흥미롭기도 하고 앞으로 기대가 되기도 한다.
GQ 가상과 현실의 공존이 보다 뚜렷한 실체를 나타내며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앞으로 패션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까?
DG 사람들이 가상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패션도 그 공간에 뛰어들 필요는 있다고 본다. 다만 패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의복과 실제 몸 사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옷을 착용함으로써 우아하거나 쿨하게, 또는 섹시하게 변신하는 현실의 경험을 가상의 무언가가 대신하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는 남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며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텐데, 이 모든 건 역시 현실에서 가장 빛나는 형태로 가능한 것 아닐까.
GQ 추함과 아름다움, 낡음과 새로움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DG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할 권한 같은 건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저 안전한 길을 걷거나 남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 스스로 ‘팔로워’가 되기를 선택하는 듯하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독단적이고 틀에 박힌 개념들이 횡행하는 것도 그런 탓인 것 같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낡음과 새로움을 나누는 것은 그 사이의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날 새롭게 보이는 많은 것도 알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완성한 쿠튀르 컬렉션처럼 말이다.
- 패션 에디터
- 이연주
- 포토그래퍼
- Bfr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