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현상수배 <1>

2014.10.14GQ

에드워드 스노든은 왜 수십만 건의 일급 기밀 서류를 유출, 미 정부가 어마어마한 감시와 도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렸을까? 미국 국가안정보장국 NSA의 불법 감청을 폭로하는 책을 쓴 적 있는 제임스 뱀포드가 그를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복잡한 암호화 패키지만 깔려 있는 내 맥북 에어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계획 변경. 호텔 로비로 오후 1시까지 올 것. 책을 한 권 가져오고 ES가 당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것.” ES는 에드워드 스노든이다. 전 세계 수배 대상 1순위인 남자. 난 이 인터뷰를 위해 아홉 달을 공들였다. 미팅을 주선해줄 법한 스노든의 친구들을 만나느라 베를린과 리우 데자네이루에 두 번씩, 뉴욕엔 여러 번 다녀왔다. 그를 만나면 넘치는 질문들 중에서도 꼭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스노든은 왜 수십만 건의 일급 기밀 서류를 유출, 정부가 국내에서 광범위한 감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렸을까? 올봄, 미국 자유인권 협회소속인 그의 변호사 벤 위즈너에게서 스노든이 모스크바에서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주겠다는 확약이 담긴 메일을 받았다. 총 사흘을 만났다. 그가 2013년 6월 러시아에 도착한 이래, 어떤 저널리스트도 그와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한 적은 없다.

난 독특한 모래 색깔로 뒤덮인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 묵었다. 차르 니콜라스 2세 시절에 세운 이곳은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다음 정부 건물이 되었다. 레스토랑에서는 레닌이 코트와 가죽 부츠 차림으로 추종자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다. 30년 동안 추적 조사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보니 메트로폴에 묵을 기회가 몇 번 있었다. 20년 전, 올드리치 에임즈나 로버트 핸슨 같은 미국 스파이들을 감독했던 KGB 고위급 빅토르 체르카신을 인터뷰할 때도 이곳에 묵었다. 러시아가 체첸에서 전쟁을 치르던 1995년에 다시 여기에 와, 영국의 악명 높은 스파이 조직 케임브리지 파이브를 운영했던 유리 모딘 요원을 만났다. 스노든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비밀 정보를 훔쳐 러시아로 달아났을 때, 워싱턴 일각에서는 그가 이런 러시아 요원들 중 하나라고 비난했다. 내가 아는 한 그건 정당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나는 스노든에게 일종의 연대감을 느낀다. 그처럼 나도 하와이의 미국 국가안정보장국NSA 부대로 배정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 중 해군에 소속되어 3년간 참전했던 활동의 일환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불법 민간인 도청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예비역이 되어 로스쿨을 다닐 때 NSA 내부 고발을 감행했다. 나는 처치 위원회의 비공개 공판에서 그 프로그램에 대해 낱낱이 증언했다. 졸업을 하고 난 뒤, 나는 NSA에 대한 첫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간첩법으로 기소하겠다는 협박을 몇 번 받기도 했는데, 스노든이 기소된 것도 1917년에 생긴 이 간첩법에 의해서였다.(내 경우에는 근거 없는 협박이었고, 실제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 나는 NSA에 대한 책을 두 권 더 썼고, 셀 수 없이 많은 잡지에 글을 실었고, 책 리뷰, 특집 기사, 다큐멘터리 등을 꾸준히 썼다.

하지만 스노든은 나와 좀 다르다. 그는 좀 특별한 ‘포스트 모던’ 내부 고발자다. 그가 작년 6월에 모스크바 공항 건물로 사라진 이후, 그를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인터랙티브 페스티벌에서 미국민들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도, 인도주의상을 받을 때도, 그의 이미지가 점보트론 화면에서 미소를 지었다. 3월의 TED 컨퍼런스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바퀴가 달린 다리 같은 기둥 두 개 위에 그의 라이브 이미지가 나오는 작은 스크린을 얹었다. 받침대를 리모컨으로 조종할 수 있어, 그가 행사장을 걸어 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사람들과 함께 셀프 카메라를 찍는 사람들을 위해 포즈까지 잡아줄 수 있었다. 이 광경은 빅 브라더가 뒤집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스노든이지만 대면 미팅을 잡을 땐 굉장히 조심스러워한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워싱턴 포스트>의 최근 기사를 읽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레그 밀러가 쓴 그 기사에 FBI, CIA, 국무부 고위직들이 매일같이 회의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지금도 스노든을 잡아들일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는 뜻이다. 그중 한 취재원이 이렇게 말했다. “우린 그가 멍청하게 비행기에 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동맹국을 시켜서 ‘너 우리나라 영공에 들어왔어. 착륙해’라고 하는 거다.” 하지만 스노든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가 러시아로 사라진 이후, 미국은 그의 행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스노든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도 뒤를 밟힐까봐 노심초사했다. 외진 동네고, 서구 관광객들이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난 로비로 들어가 정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가져오라고 했던 책을 펼쳤다. 1시가 막 지났을 때 스노든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색이 짙은 청바지와 갈색 스포츠 코트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 큰 배낭을 멨다. 내가 일어나서 그의 옆에서 걸을 때까지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어디 있었어요? 미처 못 봤네요.”

스노든이 러시아에서 지낸 지도 이제 1년이 넘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네 식품점에서 장을 보고, 러시아어도 조금 익혔다. 그는 물가는 비싸지만 뉴욕보다 깨끗하고 워싱턴보다 세련된 이곳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8월이면 스노든의 임시 망명 허가가 만료되지만, 위즈너는 푸틴 정부가 새로 허가를 내주거나 연장시켜주리라 볼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노든은 예약해둔 방으로 들어가면서 가방, 야구 모자, 짙은 선글라스를 침대 위에 던졌다. 어딘지 좀 말라 보이기도 했다. 좁은 얼굴엔 마치 어제부터 기르기 시작한 것 같은 염소수염이 희미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사각 렌즈 반무테 버버리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하늘색 셔츠는 최소 한 치수는 커 보였고, 폭이 넓은 벨트가 바지를 졸라매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성실한 대학원 1학년생 같았다.

스노든은 정보계에서 ‘업무상 보안’이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주의 깊게 행동했다. 그는 먼저 자기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뺐다. 나는 아이폰을 가져가지 않았다. 스노든과 교류하는 사람들은 전원이 꺼져 있다 해도 NSA는 손쉽게 휴대전화를 마이크로 활용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스노든이 아직 자유의 몸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쓰는 수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이나 다른 서구인들이 자주 오는 곳을 피한 것도 주효했다. 그렇지만 그가 컴퓨터 가게에 갈 때 가끔 그를 알아보는 러시아인들이 있다. 그럴 때 스노든은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며 그들에게 말한다. “쉿.”

룸서비스로 주문한 거대한 페퍼로니 피자를 나와 함께 먹어치우며 코카콜라를 마시는 스노든은 느긋하고 긍정적으로 보였다. 며칠 있으면 그의 서른한 번째 생일이다. 스노든은 언젠가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다. “난 정부에 자원해서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어요. 정당한 이유로 가는 거라면요. 나한테 일어난 일보다는, 나라가 내겐 더 중요해요. 하지만 아무리 거래 조건이 좋다 해도, 우린 법이 정치적 무기가 되는 것, 사람들에게 겁을 줘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걸 좌시할 수는 없어요. 난 그런 일에 가담하진 않을 거예요.”

스노든은 계속해서 미국을 괴롭히는 중이다. 그가 유출한 문서 자체는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났다. 문서의 복사본은 총 세 군데로 넘어갔다. 첫 번째는 탐사보도 전문가 글렌 그린왈드와 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로라 포이트라스가 세운 퍼스트 룩 미디어. 두 번째는 문서를 받았지만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서류의 보관 권리를 <뉴욕타임스>로 넘겨야 했던 <가디언>. 마지막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작가 바턴 겔먼. 이들이 서류를 NSA로 반환할 확률은 희박하다.

미국의 관료들은 다음에 공개될 서류, 다음에 일어날 외교상의 대격동, 새로운 ‘개망신’만을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스노든은 꼭 이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자신이 훔친 서류가 무엇인지를 정부에서 정확히 알도록 할 의도였다고 한다. 그가 서류를 가지고 도망치기 전에, 그는 디지털 빵 부스러기의 흔적을 남겨 수사관들이 그가 복사해서 가져간 서류, 그냥 손만 댄 서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정보원에서 자신의 동기가 내부 고발이지, 외국 정부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 정부는 미래의 서류 유출에 대비할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고. 암호어를 바꾸고, 업무 계획을 수정하고, 피해를 줄일 다른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NSA가 이런 증거를 놓치고, 스노든이 손을 댄 모든 서류 숫자만 보고했다고 생각한다. 총 170만 건이다.(스노든은 자신이 실제로 가져간 서류는 훨씬 적다고 한다.) “전 그들이 고생을 좀 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완벽할 정도로 무능하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스노든의 짐작으로는 미 정부가 그 서류 중 더 큰 게 터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 서류를 가진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비밀들 말이다. “그들 모두의 정치적 죽음을 야기할 증거가 그 중에 있다고 생각하나봐요. 정부의 수사가 실패했다는 사실, 그들이 없어진 게 무엇인지 모르고, 계속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숫자들만 불러댄다는 걸 보면 없어진 것들 중에서 그들이 무언가를 보고 난리가 났던 거죠. 그리고 그들은 그 서류가 아직도 유출된 상태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 방대한 양의 서류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예 없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다. NSA도, 서류를 가진 사람들도, 심지어 스노든 자신까지도. 그는 이 서류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방법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정보계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저 웹 크로울러를 썼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특정 키워드 또는 키워드의 조합이 들어간 모든 문서를 찾아 복사하는 프로그램이다.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다른 요소도 있다. 스노든 이름으로 공개된 정보 중 일부는 스노든이 아니라, 스노든의 이름을 빌린 다른 사람이 유출한 정보일 수도 있다. 스노든은 이 점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스노든을 만났던 것과는 무관하게, 나는 이런저런 장소에서 그가 보관해둔 문서를 아무 제한 없이 열람해본 적이 있다. 복잡한 디지털 검색 툴로 아카이브를 뒤져보았지만, 공개된 서류 중 일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에 두 번째 유출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린왈드와 보안 전문가 브리스 스나이어 역시 공개적으로 다른 고발자가 미디어에 비밀 문서를 유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힌 적 있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스노든과 첫 인터뷰를 한 날, 독일 잡지 <슈피겔>에서는 NSA가 독일에서 활동했던 이야기, 독일의 정보기관인 BND와 협업했던 이야기를 담은 긴 기사를 실었다. 이 잡지에 실린 서류 중 하나는 일급 비밀 서류인 양해각서였다. NSA와 BND가 2002년에 작성한 것이었다. <슈피겔>에서는 ‘이것은 스노든의 서류에 포함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우리는 NSA가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의 휴대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다는 폭로는 스노든의 자료에서 왔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런데 그 폭로가 있었을 당시, <데어 슈피겔>은 이것은 스노든과 그 외 익명의 정보원들에게서 온 것이라고만 했다. 만약 NSA 안에 다른 고발자가 있을 경우, NSA로선 또 하나의 악몽, 아니 그 이상의 문제다. 자신들의 정보를 다루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셈이고, 스노든을 보고 정보원 내부의 다른 사람들도 고무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문제점을 고치지 않았어요. 지금도 감사는 대충하고, 아직도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정보가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우리 대중들이 어떻게 NSA를 믿고 우리 개인정보와 기록, 우리 삶에 대한 영구 기록을 맡기겠어요?”

<슈피겔>의 이 기사를 쓴 사람 중에는 로라 포이트라스도 있다. 스노든이 최초로 접촉한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이자 영화 감독이다. 그녀가 유명인이고 암호에 능하다는 것 때문에 NSA의 다른 고발자들 역시 그녀가 끌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스노든의 서류들이 잔뜩 있으니 새 서류를 숨기기에도 이상적이다. 스노든과의 미팅 이후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내 NSA에 다른 정보원들도 있는지 대놓고 물었다. 그녀는 변호사를 통해 답을 보내왔다. “미안하지만 로라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모스크바 호텔방에서 스노든과 함께 피자를 먹은 그날, 미국 하원은 NSA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의원들은 NSA가 미국인들의 이메일과 전화 통화가 담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영장 없이 수색하는 관습을 금지시켰다. 293 대 12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였다. 민주당과 공화당 측 두 발기인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개인정보를 보관하고 검색하는 정부의 영장 없는 광범위한 보안 프로그램에 점점 더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법안 수정을 통해, 의회에서는 대중 감시를 중단하는 방향으로 확실히 한 걸음 내딛게 되었습니다.”

스노든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개혁이다. 스노든도 처음엔 이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고민했다. “전 사회 전체가 그냥 어깨나 한번 으쓱하고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NSA의 감시는 가장 시급한 국제 문제로 떠올랐다.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이 주제를 언급한 바 있고, 의회에서도 이 주제를 고려했고, 대법원은 영장 없는 도청 행위를 문제 삼을지도 모른다는 낌새를 비추었다. 대중들의 의견 역시 민간인 감시를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폭로 후 처음 1년 동안은 미 정부가 스노든을 강하게 비방했다. NSA의 디렉터 키스 알렉산더는 스노든이 이제 러시아 정보기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으며,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고 비난했다. 더 최근에는 존 케리 국무장관이 “에드워드 스노든은 겁쟁이이고, 반역자고, 자신의 국가를 배신했다”고 일침했다. 

스노든은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가 계속 진화하는 것을 쭉 지켜보고 있지만,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려 애쓴다. 그의 천성이 워낙 수줍은 것도 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하면 자신이 오만한 나르시스트로 보일까봐 우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던 대의명분에 가야 할 관심을 본의 아니게 빼앗는 것이 가장 걱정이라고 말했다. “난 엔지니어지 정치가가 아니에요. 난 무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마침내 스노든이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한다 해도 그는 과격한 선동가가 아니라 외롭고 진정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일 것 같다.

1983년 6월 21일에 태어난 스노든은 NSA 본부에서 멀지 않은 메릴랜드 교외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론은 해변 경비대 사병부터 시작해 준위까지 올라갔다. 그의 어머니 웬디는 볼티모어의 지방법원에서 일했다. 스노든의 누나 제시카는 워싱턴의 연방 사법 센터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전부 어떤 식으로든 연방 정부에 소속돼 일했어요. 가족들은 나도 같은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죠.” 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언제나 가족 중에서 에드워드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했어요.” 스노든이 두 가지 서로 다른 IQ 테스트에서 두 번 다 145 이상 기록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스노든이 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밝혔을 때, 미디어는 그가 10학년 후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교육을 덜 받은 게으름뱅이에 불과하다는 암시였다. 하지만 그가 학교를 9개월 가까이 빠진 이유는 그가 비행 청소년이어서가 아니라 단핵세포증에 걸려서였다. 한 학년을 유급하는 대신 스노든은 지역 전문대에 들어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고, 갈수록 그 사랑이 더욱 깊어져 테크 비즈니스를 하는 학교 친구의 회사에도 들어갔다. 우연의 일치지만, 그 회사는 NSA의 본부가 있는 포트 미드의 집을 건물로 썼다.

9/11 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 스노든은 사무실로 가던 중이었다. “차를 몰고 일하러 가다, 첫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쳤다는 말을 라디오로 들었어요.” 시민 정신이 투철한 미국인들 중 다수가 그랬듯, 스노든은 이 사건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2004년 봄, 팔루자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로 이라크의 지상전이 열기를 더해갈 때, 그는 미군 특수 부대에 자원했다. “나는 이라크, 알루미늄 튜브, 탄저병 세균이 든 약 같은 일에 대한 정부의 설명, 거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웠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난 그때도 정부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귀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정부의 설명대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제한적이고 타깃이 분명한 전쟁일 것이다, 라고 강하게 믿었어요. 난 내 몫의 일을 하고 싶었고요.”

스노든은 외국어를 배울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특수 부대에 유난히 끌렸다고 말한다. 적성 검사에서 좋은 결과를 받은 그는 원하는 대로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 중 사고로 두 다리가 다 골절됐고, 몇 달 후에 제대 조치되었다. 제대한 스노든은 일급비밀 시설의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보안 허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 탐지기 검사와 철저한 배경 확인을 거쳐 통과했다. 그렇게 그는 거의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비밀스런 정보의 세계에서 일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정보국에 초점을 둔 ‘잡 페어’에 참석했다가 그는 CIA의 자리를 제의 받았다. 그는 버지니아 랭글리에 있는 정보국 본부에서 컴퓨터 관련 문제를 다루는 팀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부서에 배치됐다. 그가 열여섯 살 때부터 해온 네트워크와 엔지니어링 작업의 연장선이었다. 스노든은 곧 CIA의 커다란 비밀 중 한 가지를 발견했다. 최첨단 조직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테크놀로지는 놀랍도록 낡은 것이었다. 정보국은 겉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신입 직원 스노든은 곧 두각을 나타냈고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을 위한 CIA의 비밀 학교에도 들어갔다. 2007년 3월, 스노든은 CIA가 은행 업계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던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그는 미국의 UN 파견단 소속이었다. 그에겐 외교관 여권, 제네바 호수 근처의 방 네 개짜리 아파트, 근사한 위장 임무가 주어졌다.

스노든이 CIA 요원들의 ‘도덕적 절충’을 처음으로 목격한 곳이 제네바다. 자기가 얻는 연락원의 수에 따라 승진되기 때문에, 그들은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경쟁을 벌였다. 정보원들은 타깃들이 감옥에 가게 될 만큼 취하게 만든 다음, 감옥에서 꺼내주는 걸로 타깃이 자기들에게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 “정보원들은 타깃을 끌어들이려고 정말 위험한 일들을 해요. 타깃에게 아주 부정적이고 강렬한 임팩트를 줄 일이고, 그 과정에서 들통이 난다면 우리나라의 평판에도 큰 임팩트를 주겠죠. 하지만 CIA는 그냥 저질러요.”

스노든은 제네바에서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중동 정책에 깊은 반감을 품은 간첩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CIA 요원들은 전부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했어요.” 컴퓨터 시스템과 네트워크 운영을 유지 보수하는 게 그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전쟁을 어떻게 지휘하는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접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정말 흉했던 부시 정권 때였죠. 우린 사람들을 고문하고 있었어요. 영장 없이 도청도 했고요.”

<계속>

    에디터
    제임스 뱀포드
    포토그래퍼
    PLATON ANTONI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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